"음악은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

입력 : 2016.12.29 00:25

[서울시향 베토벤 합창 지휘한 독일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갈등 많은 현대의 화합 메시지"
지난해 사임한 정명훈 대신해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연주 지휘… 황홀한 사운드 끌어내 호평

지난해 말 서울시향은 사임한 정명훈 전 예술감독을 대신해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연주를 이끌어줄 지휘자를 구해야 했다. 음악회를 불과 닷새 앞두고 대타(代打)에 나선 이는 크리스토프 에셴바흐(76). 당시 중국에 머물고 있던 에셴바흐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가 단원들과 호흡을 맞췄고, 이틀 뒤인 1월 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암보(暗譜)로 지휘하며 황홀한 사운드를 끌어냈다. 지난 7월엔 서울시향의 말러 교향곡 1번을 지휘하고, 28~29일 예술의전당에선 연말 인기 레퍼토리인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까지 지휘하게 됐으니 올 한 해 서울시향 연주를 열고 닫는 주역이 된 셈이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남자"

27일 오후 서울시향에서 만난 에셴바흐는 "1년 전 제의를 받고 맨 먼저 떠오른 단어는 '호기심'이었다"고 했다. "시향에 대해 좋은 얘기를 많이 들어서 내가 지휘를 하면 어떤 소리가 나올까 궁금했어요. 나는 호기심이 많거든요. 세종문화회관 음향이 좋진 않지만 예술의전당보다 소리에 힘이 있어 활을 강하게 켰어요. 템포도 바짝 조였고. 그래야 청중을 끌어들이니까요."

“피곤하다가도 지휘대에만 서면 에너지가 샘솟는다”는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그는“갈등이 많은 현대사회에서 교향곡 9번‘합창’은‘서로 벗과 형제가 되어 화합하라’는 베토벤의 날카로운 메시지”라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피곤하다가도 지휘대에만 서면 에너지가 샘솟는다”는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그는“갈등이 많은 현대사회에서 교향곡 9번‘합창’은‘서로 벗과 형제가 되어 화합하라’는 베토벤의 날카로운 메시지”라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1940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고아였다.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세상을 떴고, 아버지는 나치에 저항한 이유로 전쟁터에 끌려가 총알받이가 됐다. 여섯 살 때 그를 입양한 어머니 사촌이 '피아노 쳐볼래?' 제안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스물다섯에 클라라 하스킬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피아니스트로 입지를 굳혔다. 1972년 함부르크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3번을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했다.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시작으로 함부르크 NDR 심포니, 파리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지냈고, 2010년부터 워싱턴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케네디 센터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악보에 충실한 원칙주의자라는 평을 듣는다. 작품 속 본질을 파악해 긴 호흡으로 유연하게 따라간다. 스승 조지 셸과 카라얀이 가르쳐준 교훈이다.

"음악은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

1904년 카프카는 친구인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고 썼다. 에셴바흐는 "내겐 음악이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였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면서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음악이 재밌어 죽겠어요. 지휘도 그래요. 오케스트라 지휘는 100명의 신부와 동시에 하는 결혼 같아요. 한 사람과도 지지고 볶는데 100명과 했으니 얼마나 복잡하겠어요. 그래도 지휘자가 자기만의 해석으로 앞(단원)과 뒤(관객)를 사로잡으면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배어나와요. 그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죠."

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베토벤의‘합창 교향곡’연주회. /서울시향
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베토벤의‘합창 교향곡’연주회. /서울시향
그는 할리우드 배우처럼 멋스럽다. 롱코트에 날렵한 중절모를 쓰고 화려한 보스턴 가방을 즐겨 든다. 리허설 땐 동그란 금테 안경을, 혼자일 땐 새빨간 뿔테 안경을 쓴다. 알싸한 생강차를 즐겨 마시고 과일 중엔 딸기를 좋아한다. 주변에 꽃가게가 있으면 넋을 잃고 들여다본다. "감각을 벼리는 데 일상의 자극만큼 좋은 게 없다"고 했다.

다음 날인 28일 예술의전당. 에셴바흐가 지휘봉을 쥔 '합창' 교향곡 연주는 음표와 쉼표에 충분한 다이내믹을 줘서 긴장감이 살아있었다. 사운드를 과장하지 않는 해석은 담백했다.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라.' 팡파르가 울려퍼지는 순간, 그는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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