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카포네 트릴로지'→'벙커 트릴로지' 제스로 컴튼의 '고집과 도전'

입력 : 2016.12.12 10:07
"결국 폐쇄적인 공간은 인간의 심리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극단적인 환경에 몰렸을 때 진실이 나오는 법이니까요. 그것을 통해 인간의 공통된 삶과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지난해 국내 라이선스 초연한 '카포네 트릴로지'는 그해 대학로의 단연 화제작이었다.

미국 시카고 렉싱턴 호텔의 비좁은 방 661호에서 1923·1934·1943년의 시간차를 두고 벌어진 세 가지 사건을 '로키' '루시퍼' '빈디치' 세 옴니버스로 그린 작품이다. 때는 미국의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가 일대를 주름잡던 시대다. 회당 100명의 관객들은 마치 실제 호텔방에 와 있는 듯한 현실성을 체감했다. 마피아로 상징되는 힘의 논리가 정의와 도덕을 누르고 횡횡하던 시대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영리한 이 연극을 연출한 주인공은 만 28세의 영국 연출가 겸 극작가 제스로 컴튼. 그가 최근 또 다른 트릴로지 시리즈인 연극 '벙커 트릴로지' 라이선스 공연을 위해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최근 대학로에서 만난 컴튼은 "협소한 공간에서 배우들의 동선 등 연출 옵션이 줄어들 수 있지만 배우의 연기력 등을 통해 캐릭터와 작품의 감정을 좀 더 물리적으로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2014년 만든 '카포네 트릴로지'를 먼저 선보이게 됐지만 '벙커 트릴로지'가 그의 이름을 먼저 알린 작품이다.

2013-2014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전석 매진, 2014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 최고 연극상 수상 등 유명세를 이미 얻었다. 2014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해외 공식초청작으로 국내 첫선을 보였을 당시 역시 전석 매진됐다. 컴튼은 이 때 첫 내한했다.

아서왕 전설을 재해석한 에피소드로 아더·랜슬롯·가웨인 등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을 별명으로 가진 젊은 영국 청년들이 벙커에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모르가나',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고대 희랍극 '아가멤논'을 모티브로 한 '아가멤논', 셰익스피어의 동명 비극을 재해석한 에피소드 '맥베스'.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 벙커 안팎으로 벌어진 일들이 원작의 줄기를 타고, 몽환적인 기운을 머금은 채 날 것으로 그려진다.

이달 6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개막한 이 3부작은 전쟁이 문명뿐 아니라 결국 인간의 영혼까지 파괴한다는 걸 보여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이고 벙커는 심리적인 방어막일 뿐 결코 안전지대가 될 수 없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걸 드러낸다. '카포네 트릴로지'의 호텔처럼, '벙커 트릴로지'에서도 회당 관객 100명은 실제 벙커 안에 갇힌 듯한 착각의 공연장에 착석하게 된다.

내년까지 2월19일까지 아이엠컬쳐 제작, 김태형 연출로 선보이는 이 시리즈는 '카포네 트릴로지'에 이어 김 연출, 각색의 지이선 작가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카포네 트릴로지'에 나온 이석준·신성민·김지현·정연과 '날 보러와요' 박훈, '그날들' 오종혁, '블랙 메리 포핀스' 이승원, '안녕, 유에프오' 임철수가 가세했다.

한국 프로덕션은 '제스로 컴튼 프로덕션'의 날 것의 기운에 좀 더 내러티브를 부여했다. 한국 관객이 좀 더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드라마를 명확하게 한 것이다.

내한하자마자 3부작을 모두 본 컴튼 연출 역시 "드라마가 탄탄해지고 메시지가 명확해졌다"고 확인했다. "예컨대, '아가멤논'의 주인공 알베르트가 영웅 저격수인데, 영국에서는 실제로 총을 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요. 제시만 해주는데, 한국에서는 실제로 나오고 액션도 풍부해졌죠"라고 설명했다.

"정말 좋았어요. 제 프로덕션이 신선해지고 달라지니, 신기하죠. 4년 동안 작업을 한 것이 새 연출과 새 팀을 만나 새 비전을 선보이는 것이 즐겁죠. 창작자로서 세계 여러 언어로 자신의 작품이 공연되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잖아요. '카포네 트릴로지', 제 또 다른 작품인 '사이레니아'가 한국에서 인기가 많다고 해서 영광입니다."

컴튼 연출이 3부작 시리즈를 시작한 처음 이유는 사업적인 모델 때문이었다. 작품마다 러닝타임은 60분 안팎. 기존 연극의 러닝타임은 보통 2시간 안팎이다. "(러닝타임 등을 줄여) 제 작품이 더 많이 공연되거나 공연할 기회를 더 많이 가졌으면 했죠"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커다란 이야기에 대해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들려줄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획도 됐다"고 즐거워했다. "배우들이 3부작에서 동시에 여러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으니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기회도 된다"고 짚었다.

'벙커 트릴로지'와 '카포네 트릴로지'는 컴튼 연출이 구상하기는 했지만 극작가 제이미 윌크스가 함께 한 작품이다. 지난해 영국에서 이미 선보인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내년 공연이 예정된 '더 프론티어 트릴로지'에서는 컴튼 연출이 대본까지 직접 썼다.

"제 이름을 걸고 프로덕션을 처음 시작할 때 단독으로 끌고 갈 자신이 없었어요. '벙커 트릴로지'를 시작할 때는 연출 경험도 적어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죠."

요크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컴튼 연출은 대학 시절 좋은 학생이 아니었다고 웃었다. "학사 경고도 세번이나 받았어요. 공부는 제 길이 아니었어요. 매일 공연 연출을 하고 다녔거든요"라고 돌아봤다.

"제가 학교에서 연극반, 학보사에 속했는데 제가 두개 다 장을 맡고 있어서 저 없으면 마감 기한을 맞추기기 힘들었어요. 그러니 공부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죠."

긍정적이며 자기 연출에 대한 확신이 분명한 이 전도유망한 젊은 연출가는 대학로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한국 학생들도 늘고 있다.

"제가 지금 위치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고집 때문이었어요. 누군가 말하기 전까지 기다리지 않았고 도전했죠. 혹시 내 생각이 거절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저 역시 예술, 감정, 재정적으로 여러번 실패했지만 배우면서 앞으로 나아갔거든요. 다만 하룻밤에 이뤄지는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해요. 벌써 30대가 됐다고요?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애늙이라고 불렸던 제 안에는 오래전부터 노인이 살았어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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