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시국풍자 쏟아진 유쾌한 마당극…'놀보가 온다'

입력 : 2016.12.09 14:01
'비○ 실세 아니야?" 놀보가 한 가득 의심의 눈초리로 마당쇠에게 묻는다. 자신이 심술을 제대로 부리려는 찰나, 돌연 나타난 마당쇠가 본인이 극을 이끌어간다며 어깃장을 놓은 탓이다.

"두달여 대본 연습을 진행할 때 너는 없었다"는 놀부의 말에 마당쇠는 전날 그리 결정됐다고 눙친다. "낙하산이네. 낙하산이야~"라는 놀부의 토로에 마당을 쓰는 빗자루를 든 마당쇠는 "저는 '비든 실세'인데요"라고 응수한다. 객석은 시국과 겹쳐지는 풍경에 한바탕 시원하게 웃는다.

8일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개막한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신작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는 풍자와 해학의 미학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풍자와 해학, 민중의 애환을 위로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마당놀이의 본래 묘미다.

'놀보가 온다'는 심술보를 달아 오장육부가 아닌 오장칠부를 지난 놀보를 통해 각종 사회 이슈를 집약해놓은 축약판이었다. 기존 우리가 알고 있던 '흥보전'의 내용은 그대로지만 현실이 투영되며 현대판 마당놀이로 제대로 탈바꿈했다.

특히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각종 풍자와 패러디가 주를 이뤘다. 밥을 달라는 흥보 자식들 틈에 있던 놀보 처가 도망가면서 신발 한짝을 놓고 가자, 자식 중 한명이 '악마가 신는 프라다'라고 외치고, 굶주리는 쥐띠 흥보 장남은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는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놀보가 부자가 된 흥보네 집에 찾아오는 길에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을 본 뒤 "흥보가 문화융성 하려고 전속악단까지 뒀냐"라고 너스레를 떤다. 우애 깊은 흥보가 놀보를 용서해달라며 관객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놀부는 "샤이 놀부"가 있을 거라며 더 많은 관객이 손을 들기를 기대한다.

이와 함께 늘품체조, 블랙리스트, 그리고 물대포도 등장한다. 다음 시즌을 예고하는 홍길동은 촛불을 들고 나타나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자기 같은 사람이 바쁘다고 눙친다.

극본을 쓴 배삼식 작가는 이처럼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현 시국을 뒤덮은 관련 이슈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최순실 게이트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이슈도 똬리를 틀고 있다. 놀보가 홍보를 때리는 장면에서, 폭행을 휘두른 대기업 어느 총수가 떠오른다. 놀보가 쌀과 돈을 융통해달라는 흥보의 청을 거절하면서 친족끼리 물품을 주고받으면 "너무 가까운 사이라 부정청탁금지법"에 걸리다고 눙을 치기도 한다.

마당놀이의 시원한 풍자와 유쾌한 해학을 지켜보는 내내 객석에 그간 쌓여 있던 스트레스와 근심을 싹 내려 보내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 시국에 기반한 풍자와 해학만이 '놀보가 온다'의 미덕은 아니다. 맥락없는 풍자는 정치적이기만 할 수 있는데 예술성을 가미한 '놀보가 온다'는 공연예술의 미학으로 서민들의 상실, 슬픔을 달랜다.

하얀옷, 검은옷이 절묘하게 배합된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제비로 분한 장면에서 국수호가 안무한 춤은 우아함의 절정이었다. 흥보와 흥보 처, 자식들이 박을 탈 때 비단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장면에서는 눈이 호강한다.

흥보네가 부자가 돼 벌이는 잔치는 발레의 디베르티스망을 보는 듯했다. 기분전환, 여흥 등이라는 뜻으로 발레에서 이야기의 맥락과 크게 상관 없이 무용수들의 다양한 기교를 볼 수 있는 순간이다.

'놀보가 온다'에서는 줄타기, 북청사자놀음 등을 통해 명인들의 다양한 기교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날을 포함해 일부 회차에 등장하는 권원태 명인의 줄타기는 탄성을 자아냈다. 해오름 무대 위에 세운 900석 가량의 가설 객석에서 뛰노는 배우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관객들은 박수를 치느라 두 시간이 지나가는 줄 몰랐다. 마지막 장면에 출연진들과 손을 잡고 무대 위를 동그랗게 돌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화로 정치, 사회, 아픔, 문화를 나누는 이날 마당은 마치 토요일 광화문 광장이 극장 안으로 들어온 듯한 쾌감을 불러왔다. 여기에 '흥보전'의 정수인 형제의 우애, 용서,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 더해지니 과연 공연예술의 '종합선물 세트'라 부를 만했다.

마당놀이는 1981년 시작돼 30년 동안 25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주목받았다. 하지만 2010년 30주년 공연을 마지막으로 열리지 않았다. 국립극장은 2014년 '심청이 온다'로 마당놀이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고 지난해 '춘향이 온다'로 이 장르를 확고히 했다. '놀보가 온다'는 그 위에서 펼쳐진 성찬이다.

국수호 안무가를 비롯해 손진책 연출, 작곡 박범훈, 극본 김지일 등 마당놀이 신화를 만들었던 원조 제작진 그대로다. 연희감독을 맡은 김성녀 예술감독이 이끄는 국립창극단 단원들, 요즘 음악 못지않은 리드미컬한 연주를 들려준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들에게도 공을 돌려야 한다.

특히 국립극장 마당놀이 터줏대감이자 코믹 연기의 대가인 김학용의 심술 가득하지만 귀여운 놀보, 국립창극단의 막내 단원이지만 믿음직스러운 신예 유태평양의 순한 흥보, 이광복의 재기발랄한 마당쇠도 기억해야 한다.

클래식음악계의 베토벤 9번 '합창', 발레계의 '호두까기 인형'처럼 국립극장 마당놀이도 공연계 송년 레퍼토리로 확실히 도장을 찍게 됐다. 2017년 1월2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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