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선] 육완순 인생이 곧 춤이었다

입력 : 2016.12.17 14:32

불모지였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발레라는 클래식한 장르도 생소하던 때, 현대무용을 처음으로 국내에 들여온 주인공이다. “그저 자유로운 춤을 희구했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게 국내 현대무용의 시초가 됐다.

<유관순><(1982) 공연에서의 육완순 여사. 유관순이 옥중에서 회상하는 동지애, 피 끓는 애국심,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갈등 등에 초점을 맞춰 안무했다.
<유관순><(1982) 공연에서의 육완순 여사. 유관순이 옥중에서 회상하는 동지애, 피 끓는 애국심,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갈등 등에 초점을 맞춰 안무했다.

# 명동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이 발칵 뒤집어졌다. 지난 1963년의 일이다. 몸이 훤히 드러난 옷을 입은 여자들이 무대에서 맨발로 구르고 뛰고 거꾸로 섰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현대무용 공연. 절제된 몸동작이 주를 이루는 전통춤만 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당대의 누군가로 잠깐 빙의해보자면, 아마 ‘난장판’이었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무용계 원로들은 혹평을 쏟아냈다. 야만인들의 춤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젊은 관객들은 달랐다. 자유로운 몸짓에 환호했다.

‘형식 파괴의 춤, 그 시대 가장 자유로운 춤을 췄던 사람.’ 무용계는 그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한 1963년을 ‘한국에서 현대무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표기하고,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후 제자들과 함께 창단한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은 대학동문 무용단의 시초가 됐다. 수많은 현대 무용단과 안무가, 무용수를 배출했다. 육 여사는 1933년생이다. 나이가 무색해 보였다. 피부가 좋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여든이 넘은 연세가 무색합니다. 비결을 많이 물어오죠? 혹시 춤입니까?
그저 바쁘게 사는 거예요. 쉬지 않고 바쁘게. 춤은 늘 추죠.

요즘은 뭘로 바쁩니까?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는 록오페라다. 영국의 팀 라이스와 앤드류 웨버가 작사와 작곡을 했다. 육완순은 여기에 안무를 입혀, 세계 최초로 이를 현대무용극으로 재탄생시켰다. 1973년 초연 당시 ‘백 번의 설교를 능가하는 위력을 느끼게 한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대표작이다.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300회 넘게 공연했을 정도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오는 12월 중순에도 양일간 공연할 예정이다.

벌써 40년 전입니다. 이대 교수 재직시절에 초연했지요?
1973년, 부활절을 앞둔 어느 날이었어요. 기독교 학교니까 그때 학교에서 예배를 드린단 말예요. 교목실에서 몇몇이 그날 뭘 하면 좋을까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동료 교수가 미국 유학시절 룸메이트에게 받았다면서 테이프를 하나 주더라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히는 걸 록오페라로 만든 음악인데, 너무 감동적으로 들었다고.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렇게 감동적이라면, 그 음악에 안무를 입혀서 부활절에 무용예배를 드리자’고 결정이 된 거예요. 그땐 록오페라라는 장르가 뭔지 누가 알아요. 그래서 그냥 반신반의하며 여차저차 무대에 올렸는데, 난리가 났죠. 대강당이 4천 석인데 1만 명이 모였어요. 다 들어오지도 못했죠. 대히트였어요. 여대생들이 그렇게 흥을 내더라고요. 발을 구르고, 의자를 치면서.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은 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나 봐요.

학교 측에서는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랬죠. 그때 이사장님이 절 불러서 한 소리 하시더라고요. ‘육 교수, 열심히 하는 건 알겠는데 앞으로는 이런 일 벌이지 말라’고. 네, 하고 나왔는데 그 이후부터 교목실에 전화가 빗발쳤어요. 앙코르 공연 언제 하느냐고. 초연 때는 학생들만 관람이 가능했는데, 2회 차부터는 외부인에게도 티켓 교부를 했고, 그게 전국 순회공연으로 퍼지고 결국 해외 순방까지 간 거죠. 그렇게 40년이 흐른 거고요.

선생께는 태초부터 도전정신이 있었나 봅니다.
도전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초연 때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1시간 30분짜리 공연인데, 준비기간은 딱 3주였어요. 보통 5분짜리 안무를 짜는 데도 한 달이 걸려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잖아요. 한 달 동안 하루 두 시간 잤어요. 그때는 안 자도 되더라고. 최선을 다했더니 드디어 되더라고요.

잘 따라준 제자 덕도 있지요?
그렇죠. 그때는 통금이 있었단 말예요. 새벽 4시에 사이렌이 울려. 차 타고 오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집결 시간은 5시. 정각에 안 모이면 빼버렸어요. 그랬더니 다들 얼마나 열심히 달려오던지. 5시부터 수업 직전까지 연습해요. 그리고 오전 9시가 되면 다들 1교시에 싹 들어가게 해요. 오후 5시에 수업 끝나면 또 다 같이 모여서 밤 11시까지 연습했어요. 12시 통금이니까. 1시간 동안은 아이들이 버스 타고 가야 하니까.

사위인 이문세와, 지난 2014년.
사위인 이문세와, 지난 2014년.

사위 이문세와의 컬래버레이션

그의 남편은 서울대 지질학과 교수였던 이상만 선생이다. 현재도 지질학계에서 알아주는 학자다. 이상만 선생은 은퇴 후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림도 그린다. 육 여사는 남편이 써준 대본으로 <우주의 발달상>이라는 작품을 만든 적도 있다.

그때 이상만 선생과 결혼한 후였죠? 집에 있는 시간이 없었을 텐데, 뭐라 안 하시덥니까.
만날 새벽에 나가니까 남편이 불안하잖아요. 여자 혼자 컴컴한데. 그러니까 새벽마다 택시로 항상 출근을 시켜주고 집으로 갔어요. 남편의 협조 없이는 힘들었을 거예요.

노래에다 동작을 입히는 것.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거잖아요. 가늠이 잘 안 돼요. 어떤 과정을 거치는 겁니까?
저는 모태신앙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래서 가능했던 면도 있어요. 종교가 있나요?

무교입니다.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꿈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어요. 꿈속에서 비디오처럼 장면이 지나갔어요. 그러면 벌떡 일어나서 꿈속에서 본 걸 써 내려가는 거예요. 여기는 군무, 여기는 솔로, 여기는 누구, 이렇게 다 쓰고, 그리고요. 가장 골머리를 싸맨 장면들은 항상 그렇게 꿈에서 영감을 주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를 조금이라도 흔들면 기억이 날아갈까 봐 세수도 고이고이 했지요.

시대별로 안무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초연 때 워낙 심혈을 기울여서 짰거든요. 어느 한 장면도 허투루 안 했어요. 다 뜻이 있었고, 그야말로 혼신을 다했어요. 그렇게 짠 안무를 주역들이 소화를 못 해내면 내가 무척 꾸짖었지. “손을, 발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해라, 가슴으로 표현해라.”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 40년간 주역이 많이 바뀌었을 거 아녜요. 주역마다 잘하는 동작이 있고, 잘 안 되는 동작이 있어요. 도저히 소화를 못 하는 동작이 있으면 조금 수정을 해요. 그러니까 주역에 따라 동작이 조금씩 바뀌어왔죠.

초연과 오는 12월 중순에 있을 공연, 어떤 점이 다릅니까. 어떻게 진화했나요?
우선 음향의 차원이 달라요. 정말 현실감 넘치지. 영상을 가미한 지는 꽤 됐는데, 초연 때는 그런 게 없었죠.

이문세 씨가 음악감독을 맡고 있죠?
초연할 때는 우리 딸이 초등학생이었으니까 그땐 사위가 없었고. 1990년부터 사위랑 같이했어요. 자기가 음악을 맡겠다고 먼저 제안을 해왔었지요. 언젠가 내 공연을 보고 난 다음에, “어머니 다 좋은데 음악이 좀…” 그러면서 자기가 맡아서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흔쾌히 그러라고 했죠. 아무래도 음악 하는 사람이 하니까 다르긴 다르데요. 나는 그냥 테이프 틀어놓고 했었단 말예요. 그걸 보더니 안 되겠다 싶었겠지. 사위가 와서 일일이 극장 구석구석 다 둘러보면서 시스템을 확인하고, 음향기기들을 싹 가지고 왔어요. 이제는 예수가 매 맞는 소리부터 달라요.

공연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있는데, 사위와 부쩍 접촉이 잦아졌겠어요.
그렇지도 않아요. 벌써 몇 년째 같이하는데, 이젠 굳이 말 안 해도 척하면 척이니까. 믿는 거지. 전적으로 맡겨요. 나는 안무를 하고, 사위는 음악 하고. 각자의 분야에만 신경 쓰면 돼. 아주 좋아요. 아이디어도 많이 주고요. 가끔씩 안무에 대한 지적도 해줘요. “어머니, 그 친구는 그 동작이 좀 약한 것 같던데” 이러면서요. 그럼 내가 웃으면서 “그러지 말고 네가 출연해보라”고 하죠.

그러게요. 이문세 씨가 예수 역할을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안 한다고 하더라고. 전문 무용가끼리 하는 데 끼면 안 된다고.

한국컨템포러리 무용단의 30주년 기념공연.
한국컨템포러리 무용단의 30주년 기념공연.

2000년도에는 <육완순과 이문세의 퍼포먼스>도 있었어요.
사위한테 그랬어요. 밀레니엄 해인데, 네 음악에다 내 무용을 입혀서 공연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아주 성공적인 공연이었어요. 양쪽 팬들이 다 몰려오니까. 그것도 전국 순회공연까지 했죠. 사위 노래가 굉장히 서정적이잖아요. 그중에서도 스무 곡을 뽑아서 내가 일일이 안무를 입혔어요. 대신 사위한테 말했지. 너 노래할 때 우리 무용수들 무대 뒤로 빼지 말고 앞에 세우라고. 노래하는 사람 뒤에 있으면 백댄서가 되니까요. 나는 내 무용수들이 백댄서 되는 거 싫다고요. 그랬더니 군소리 없이 뒤에 가서 노래하더라고요.

갑자기 이문세 씨 노래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이 뭔지 궁금하네요.
‘그대’라는 노래가 좋더라고요. 내가 안무를 입힌 곡 중 하난데, 노랫말과 무척 잘 어울려서 마음에 좋아요. 노래로만 따지면, 제목이 갑자기 생각 안 나네. 비… 뭔데 말이에요. 비 오는 소리 나는 노래인데, 기억이 안 나. ‘시를 위한 시’라는 노래도 참 좋아해요. ‘사랑이 지나가면’도 참 좋지.

노래방 같은 데서 부르기도 하나요?
에이, 노래는 잘 안 불러요. 듣는 걸 좋아하지. 엊그젠가도 문세 공연에 갔다 왔는데, 요즘엔 진짜 공연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다들 일어나서 춤추고 그러데요. 또 사위가 워낙 말을 잘하잖아. 관객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

이문세 씨 공연을 빠지지 않고 가시나 봐요.
그럼, 가야죠. 여태 한 번도 빼놓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공연할 때도 갔던걸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간 건 아니고, 내가 미국에 있는 기간이랑 겹쳐서.

사위 사랑이 대단하십니다.
딸 사랑인 거죠. 내 딸 남자 발전하고 있는지 봐야 하니까. 공연 보고 나서는 내가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피드백을 해요. 왼쪽보다 오른쪽에 서는 게 좋겠다, 이런 것들.

우리가 열광하는 이문세 공연을 만드는 숨은 세력이시군요.
사위가 또 내 얘기를 잘 듣고, 반영을 잘 해요. 내가 관객석에 있으니까 잘 알잖아요. 우리 딸도 자기 남편 공연에는 항상 갑니다. 걔는 보면, 수첩 들고 아주 꼼꼼히 다 적어요.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그리고 끝나고 나서 그래요. “엄마, 고칠 것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요.” 이 서방한테 직접 얘기하면 섭섭해할 수도 있으니까 자길 통해서 하라는 거죠. 근데 저는 직접 말해요. 특히 이번 연말공연은 무대가 정말 좋더라고요. 공연 보고 집에 와서도 또 문자를 보냈어요. ‘이번이 진짜 본 중에 최고다. 영상도 너무 아름답고 전문 무용수를 써서 춤도 굉장히 좋더라.’

예술을 논할 때는 딸보다 사위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말이 잘 통하니까.

선생님의 따님은 워낙 드러나지 않았어요.
딸이 워낙 그걸 싫어해요. 딸 아버지도 그렇고. (연예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철석같이 약속을 했다고요. 철저히 드러나지 않게 하라고. 사위랑 둘이 길 가다 보면 수군대는 사람도 있대요. 이문세가 어떤 여자랑 데이트한다고.

얼굴이 워낙 안 알려져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것도 그런데, 우리 딸이 워낙 동안이에요. 사람들이 오해할 만하지.

부인의 사생활을 지켜준 이문세 씨의 아내 사랑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렇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딸 이름도 지현이에요.

저는 뜻 지에 어질 현을 씁니다.
우리 딸은 옥돌 현(玹) 자를 써요. 우리 남편이 지질학자라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요. 그땐 지현이가 예쁜 이름이었지.

따님이 엄마, 아빠 중 누굴 더 닮았습니까.
아빠를 더 닮은 것 같아요. 예술과라기보다는 이과예요. 딸이 무용을 했으면 했어요. 초등학교 때 가르쳤는데, 중학교 들어가자마자 딱 끊어버리더라고요. 얼마나 섭섭했는지.

부군께서는 어땠습니까. 따님이 무용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항상 몸 구석구석에 굳은살이 배어 있었고, 피가 나기도 하고 멍이 들어 있었어요. 근데도 아무 소리 안 하더니 딸이 그러니까 그걸 못 보더라고요. 나는 발등이니 무릎이니 많이 다쳐도 그런가 보다 하더니, 딸은 조금만 다쳐도 길길이 날뛰었어요.

안무에 숨을 불어넣다

# 언제부터 춤을 췄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곧 춤이었다. 일제강점기·전쟁. 목숨 부지하기도 위태로웠던 시간 속에서도 춤을 췄다. 보통 기쁠 때 추는 게 춤이라 생각하지만, 그에겐 달랐다.

인생의 첫 춤이 언제였습니까.
‘자유로운 춤’을 춘 걸로 치면 경계를 짓기가 모호해요. 기억하기로는 5살 때인가부터 춤을 춘 것 같네요. 성탄절 날 찬송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어리신 예수’에 맞춰서 췄는데, 아직도 그 안무가 기억나요.

배우지도 않았는데 춤을 췄다…. 내력이 있습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두 분 다 노래도 잘하시고, 기질이 있었던 같아요. 내가 5남매인데, 그중 딸이 셋이에요. 셋 다 무용을 했어요. 언니가 전주여고 시절에 무용을 했었고, 졸업하고 사범대를 가서 무용 선생님이 됐어요. 언니가 선생님으로 있는 초등학교에 내가 입학을 해서 우리 언니가 내 무용선생님이었어요. 언니랑 터울이 컸거든. 어느 날 동생도 무용을 하겠대요. 그래서 내가 너는 하지 말라고 했죠.

동생을 위한 말이었습니까?
아니요. 따라 하는 게 싫더라고요. 내가 욕심이 많았거든. 나만 하고 싶었어요. 나 따라서 체육학과 간다는 걸 내가 결사반대를 해서 동생은 이대 가정학과를 갔어요.

당시 무용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흔쾌히 허락을 하던가요?
교육열이 엄청났던 집안이라 반대가 심했어요. 특히 할아버지가 춤은 상것들이나 추는 거라며 완강하게 반대했어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무용으로 대학을 간다고 하니까…. 그땐 여자들이 대학 가는 때도 아니었어요. 고등학교면 족하다고 했지. 그래서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친구하고 둘이 같이 기차 타고 가서 원서 접수하자고. 친구는 연극을 하고 싶어 했어요. 그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몰라. 며칠 동안 먹을 쌀이랑 자금을 모아놓고 동이 트기도 전에 컴컴한데 기차역으로 갔어요. 근데 친구가 안 나와요. 걔는 나오다가 붙잡힌 거야. 나 혼자 벌벌 떨면서 기차를 탔죠. 그때 부모님이 전주에서 조금 유명했어요. 그래서 역무원들이 내 얼굴을 다 알았단 말예요. 얼굴을 둘둘 감고 아주 첩보작전이 따로 없었어요.

대학교 가는 게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때가 전쟁 직후라서 한강 다리가 끊겼어요. 그래서 대학들이 다 부산으로 내려와 있었다고. 부산 어디 산 위에 판자촌으로 각 대학들이 천막 치고 있었어요. 거길 가겠다고 그 새벽에 그렇게 나온 거예요. 언니가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엉엉 우는데 내가 결심한 걸 무너뜨릴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하니까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

#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이대부고 무용 교사, 경희대 무용학과 강사로 교직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동 대학원 석사를 마쳤다. ‘진정한 생명과 자유가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춤을 추고 싶다’는 꿈을 안고 1961년에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타국에서 굉장히 외로웠겠습니다.
시를 읊으며 동작을 하는 시험이 있었어요. 시를 체화해서 동작으로 그려내는 거죠. 당연히 영어 시였겠죠. 그런데 내가 영어 시를 어떻게 공감해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감동이 안 와서 몸이 안 움직인다’고 했더니 한국 시를 읊으래요. 한국 시로 하니까 바로 반응이 오더라고.

무슨 시였습니까.
김소월의 <초혼>.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몸짓, 표현하려는 몸짓, 마음속에 있는 몸짓은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더라고요. 서구인들은 직선 위주예요. 크고 뻣뻣해요. 우리는 곡선이 많아서 아주 부드럽죠.

60년대 때 미국유학이면 수재였다고 봐도 됩니까.
대학 입학 때보다 훨씬 험한 산을 넘었죠. 그때는 문교부에서 주관하는 유학 시험이라는 게 있었어요. 계속 낙방했지. 묘안을 생각해냈어요. 대사관을 통해서 ‘미국 내에서 현대무용을 가르치는 대학’을 쫙 뽑아보니까 80개 정도 되더라고요. 안 되는 영어로 타이핑을 쳐서 현대무용을 배우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어요. 도착하는 데 만 한 달이 걸렸지. 한 달 후부터 회신이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참 정직한 나라구나 싶었던 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 하나도 빠짐없이 왔어요. 80군데 중에 3군데에서는 긍정적인 답변. 그중 일리노이가 조건이 제일 좋았어요.

# 그는 일리노이 대학으로 ‘티칭 펠로우십’ 장학금을 받고 갔다. 뉴욕에 있는 마사 그레이엄의 ‘컨템퍼러리 댄스 스쿨’에 다닐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그레이엄은 ‘기교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세계 무용사에 큰 획을 그은 거물이다. 20세기 최고의 현대무용가에게 가르침을 받은 셈이다.

마사 그레이엄에게 춤을 배우셨죠?
뉴욕에 있을 때 스승 마사 그레이엄에게서 “내 춤을 모방하지 마라. 너의 춤을 춰라”라는 가르침을 받았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춤에 참 출중하다는 걸 이역만리 땅에서 알았어요. 현대무용을 외국에서 배우고 있는데, 신기하게 내 몸에서 나오는 게 다 한국적이라고 했어요. 내 몸에 대한민국의 정서가 들어 있구나, 싶었지요.

선생께서는 후학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지요?
나는 안무를 생명처럼 가르쳐요. 몸둥아리만 움직이는 안무에는 생명이 없죠. 애들한테 항상 부르짖다시피 하는 게 있어요. “몸속 깊은 곳에서 우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동작해야 한다.” 진심이 안 담겨 있으면 딱딱한 동작들만 나와요. 우러나오면 곡선이 되죠.

현대무용이라는 성장수(成長樹)의 뿌리가 육완순이고, 이제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셨군요.
미국 유학시절 스승이 그랬습니다. 여기서 계속 무용을 하라고요. 저는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계속 그랬어요. 현대무용의 씨를 뿌려야 한다, 나는 그 씨를 심어야 한다, 내가 심어야 한다….

# 1973년 창단한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은 지난해 역사 속에 남았다. 국내 최초 현대무용단의 해단이었다. 또 다른 나무는 육완순이라는 뿌리에서 자란 열매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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