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시규어 로스, 희망어로 쓴 문학 닮은 공연

입력 : 2016.11.23 09:30
태초에 빛 그리고 음악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무대 위에 한 줄기 빛이 내리꽂히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순간 아이슬란드 포스트록 밴드 '시규어 로스' 세 멤버가 등장했다.

본인들을 닮은 시린 추위를 몰고 온 22일 소설(小雪) 저녁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소설(小說), 아니 시(詩)에 가까운, 문학을 닮은 공연의 프롤로그 '오베르(ovedur)'를 펼치기 직전이었다.

시규어 로스의 주된 문학 언어는 희망어. '이-보(e-bow)', '포플라이드(popplagid)' 등 3집 '( )' 수록곡이 주로 이 언어다. '욘시'로 통하는 보컬 욘 소르 비르기손은 희망어가 노래 자체를 해방시켜준다고 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미지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날 공연장을 가득 채운 7000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희망어를 써내려가는 펜은 욘시의 가늘지만 꾹꾹 눌러쓴 듯한 목소리였다. 드림팝, 슈게이징, 앰비언트를 오가는 폭풍 속에서 상록수 같았다. 그가 바이올린 활로 일렉 기타를 칠 때, 아니 켤 때 나오는 사운드에는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 5악장 '샤콘느'를 닮은 경건함이 깃들었다. 이들의 묘한 조화가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았다.

특히 '니 바테리(Ny Batteri)'는 필름 누아르 풍의 베이스의 아름다움, '페스티벌'은 클래식음악의 푸가 형식처럼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점층적인 미학으로 황홀경을 선사했다. 시규어 로스를 작가에 비유하자면 팝계에 제임스 조이스인 셈이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심리주의 기법으로 유명한 소설가 조이스의 문체를 악보로 옮겨놓았다고 할까.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혹자는 '상상의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호메로스에도 가깝다. 그리스의 작가이자 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로 유명한 음유시인이다.

호메로스는 기술 작가보다 구술 작가에 방점이 찍혀 있다. 달리 음유시인인가. 제목조차 한글로 명기가 어렵지만, 노래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시규어 로스 역시 구술 작가로 부를 만하다. 공연으로 즉 시를 쓰는 셈인데 콘서트로 노벨문학상을 꼽는다면, 영국 베팅업체 래드브록스가 배당률 10대 1쯤을 줄만한 팀이다.

이날 아이슬란드의 광활하고 몽환적인 오로라를 떠올리게 하는 영상들은 테크놀로지가 이처럼 시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특히 '사이로퍼(saeglopur)'는 에메랄드 빛 은하수 또는 푸른빛 바다를 유영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90분 공연 도중 다른 멘트가 필요가 없었다. 아이슬란드어로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 앙코르 없이 커튼콜만 두 번 한 이후 무대를 떠났다. 에필로그가 비어 있었지만, 그래서 더 여운이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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