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설 때의 떨림이 좋아요, 천생 지휘자인가 봐"

입력 : 2016.11.15 00:03

[미국 名지휘자 데이비드 진먼]

롯데콘서트홀서 NHK 심포니와 구레츠키의 '슬픔의 노래' 지휘
1991년 동명의 교향곡 음반 내 美 클래식 차트서 38주간 1위
세월호 참사땐 유족 위한 연주도

먹물 한 방울이 한지에 툭 떨어져 번지는 듯했다. 13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 더블베이스가 굵은 저음으로 읊조리듯 소리를 냈다. 다른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무대에서 꼼짝도 안 했다. 첼로가 가세하고, 고음의 비올라와 바이올린이 동참하면서 두텁고 진한 현(絃)의 울림을 만들어냈다. 데이비드 진먼(80)이 지휘한 폴란드 작곡가 헨리크 구레츠키(1933~2010)의 '슬픔의 노래'였다.

구레츠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스러져간 넋들을 달래기 위해 쓴 이 교향곡은 단순한 음률 위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애가(1·3악장)를 담았고, 게슈타포 사령부 지하 무덤에 갇힌 18세 소녀가 고문실 벽에 쓴 기도문(2악장)을 소프라노의 절절한 목소리에 얹었다. 1991년 진먼이 소프라노 돈 업쇼(56), 런던 신포니에타와 낸 이 교향곡 음반은 미국 클래식 앨범 차트에서 38주 동안 1위를 했다. 2년 동안 70만장 넘게 팔렸고, 누적 판매량이 100만장에 달하는 히트작이다.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으로 여러 악단을 일류로 끌어올린 데이비드 진먼은 비결로 '시간'을 꼽았다. "기초를 탄탄히 쌓으면서 다 같이 앙상블을 만들어나가야 해요. 그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요." /고운호 객원기자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으로 여러 악단을 일류로 끌어올린 데이비드 진먼은 비결로 '시간'을 꼽았다. "기초를 탄탄히 쌓으면서 다 같이 앙상블을 만들어나가야 해요. 그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요." /고운호 객원기자
연주 이튿날인 14일 호텔에서 만난 진먼은 "업쇼와 녹음하면서 '200장만 팔려도 괜찮지'라고 농담했는데 엄청나게 성공해 놀랐다"고 했다. "구레츠키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가 원한 건 소리가 깨질 듯 절망적이면서도 정결한 읊조림을 반복해 슬픔의 근원을 마주하는 거였어요. 바닥까지 게워내야 비로소 다시 채울 수 있는 불교의 공(空) 사상처럼." 진먼은 "삶은 슬픔의 연속.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처럼 각자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 있다. 분노를 넘어 슬픔으로 정화하는'슬픔의 노래'는 내 슬픔을 나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라디오에서 이 곡이 나오면 차를 멈추고 듣는 걸 봤다. 그걸로 충분했다"고 말했다.

뉴욕 출신인 진먼은 피에르 몽퇴에게 지휘를 배우고 1963년 스물일곱에 데뷔했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필하모닉, 미국 동부의 볼티모어 심포니, 스위스의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같은 악단들을 일류 연주단체로 키워냈다. 톤할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5개의 그래미상을 휩쓸었고, 100여장의 방대한 음반을 내놓은 명(名)지휘자다.

국내 청중에게 진먼은 2014년 4월 들려준 따뜻한 '진심'으로 기억된다. 세월호 참사(4월 16일) 닷새 후, 톤할레 오케스트라와 내한한 그는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위해 바친다"며 공연에 앞서 바흐의 '에어(Air)'를 연주했다. 'G선상의 아리아'로 잘 알려진 차분한 곡조는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그로부터 석 달 뒤 진먼은 20년을 함께한 톤할레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났다. "지휘봉을 바늘 삼아 평생 음표와 악구, 리듬을 짰더니 오른손 집게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굽혀지질 않는다"고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만의 악단을 맡아 마지막 열정을 쏟아붓고 싶지만…."

음악은 다른 이의 마음에 가닿으려고 하는 것. 진먼은 "작곡가들이 남긴 우주 같은 책(악보)을 읽고 해석해주는 통역가가 되고 싶었다. 여전히 무대에 서려면 떨리지만 그 순간이 좋다. 다시 태어나도 지휘를 하려나 보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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