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더블데이트] '트로이의 여인들' 명창 안숙선 vs 뮤지션 정재일

입력 : 2016.11.14 09:57
명창은 연신 후배 아티스트 칭찬에 혀를 내둘렀고, 전방위 뮤지션은 거장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거듭 몸을 낮췄다.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국립창극단 신작 창극 ‘트로이의 연인들’(11~20일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작창을 맡은 안숙선(67)과 작곡·음악감독을 맡은 정재일(34)이 서른살이 넘는 나이차와 기반 장르의 상이함에도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고 있다. 판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미니멀리즘이 기대를 모은다.

정 감독은 연출 옹켕센, 안 명창과 함께 소리꾼과 고수가 함께 판을 이끌어가는 판소리의 형식을 십분 살리고 있다.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큐바의 장엄한 목소리는 거문고,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의 목소리는 대금이 맡는 등 배역별로 지정된 악기가 소리꾼과 짝을 이룬다.

기원전 1350년에서 110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이 전쟁 관련 신화와 전설이 기반이다. 헤큐바,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헬레네로 대표되는 네 명의 여인들이 벼랑 끝에서 선택하는 각기 다른 감정과 삶의 방식을 그린다. ‘한국적 말맛’을 살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배삼식 작가가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의 여인들’(기원전 415)과 장 폴 사르트르가 개작한 동명 작품(1965)을 바탕으로 창극을 위한 극본을 다시 썼다.

최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만난 안 명창은 서양 이야기를 다룬 작창은 처음이라며 “그리스 역사를 제가 잘 모르니까 소리로 표현이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며 “트로이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런 아픔은 우리에게도 있죠. 춘향이의 개인적인 슬픔도 큰 아픔이듯, 개인적으로도 누구나 아픔이 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어요.”

싱가포르의 세계적인 연출가인 옹켕센의 ‘열린 마음’이 그런 깨달음의 큰 지분을 차지한다. “한국문화를 겸허하게 수용하시는 분이에요. 우리 음악을 좋아하고 고유의 정서를 이해하시는 분이죠. 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런 점은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창극 음악은 처음 맡는 정재일 역시 옹켕센에 대한 믿음 때문에 작품 참여를 결정했다. “제일 중요한 건 판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연출님 역시 그걸 중심으로 미장센을 구상하고 계시더라고요. 안숙선 선생님이 소리를 만들어주시는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해요.”

정 감독은 안 명창 존재 차제가 판소리라고 눈을 총총거렸다. “선생님의 소리로 인해 그리스 비극인데 우리 판쇠 다섯 바탕 중 하나인 것처럼 들렸다”고 말했다.

안 명창은 ‘트로이의 여인들’ 작업이 실험적이라고 생각했다. 해외 연출가 서양 음악 기반의 정 감독 등이 함께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리를 잘 이해하는 정 감독 때문에 편했다고 만족스러워했다. “판소리는 악보만 가지고 다 담을 수 없어요. 그 부분들은 시김새(음을 꾸며내는 모양새)로 버무려지기를 바랐는데 합창을 들어보니까, 제가 생각하는 것을 잘 멋지게 표현했더라고요. 판소리는 혼자 하지만 창극이니까, 합창 부분이 나오는데 우리 정체성을 잘 살리면서 실험적인 덧칠을 한 거죠.”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인 안숙선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한국을 대표하는 대명창이다.

밴드 ‘긱스’와 국악그룹 ‘푸리’ 등을 거친 정재일은 박효신 등 대중음악과 뮤지컬,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전방위 뮤지션이다.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와도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뛰어난 작곡, 편곡 감각으로 음악계에서는 천재 뮤지션으로 이름 나 있다.

두 사람은 ‘음유시인’으로 통하는 미국의 포크록 대부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타는 걸 지켜보면서 판소리의 문학적인 맥락도 새삼 톺아봤다.

안 명창은 “판소리는 대단한 문학이에요. 해학적인 부분도 대단하죠. 재일 씨 같은 젊은 뮤지션들이 잘 알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웃었다.

정재일은 “판소리는 한 작자가 만든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전해져오면서 아주 많은 층이 쌓였다”며 “‘적벽가’만 들어도 중국의 거대한 고전을 해학을 잃지 않고도 한국적으로 풀어내는 카타르시스가 일품”이라고 전했다.

안 명창은 “‘적벽가’가 삼국의 힘겨루기 속에도 관우와 조조의 관계 등, 단지 이기고 지는 것의 문제가 삶과 사람의 심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들려준다”고 높게 봤다.

그녀는 ‘트로이의 여인들’ 같은 실험적인 창극 작업이 많아지는 동시에 순수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판도 꾸준히 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립극장 완창판소리’가 예다. “세계와 통하는 동시에 나라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 필요해요. 우리나라에서만 할 수 있는거지요.”

소리꾼 한승석과의 ‘바리 어밴던드(abandoned)’ 등을 작업하기도 한 정 감독은 “전통을 대할 때는 무조건 공부하는 자세로 임한다”며 “국악을 할 때 어설프게 작곡의 자세를 들이미지 않는다. 노래하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들의 음악이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그런 지점을 잘 살린 작품”이라고 말했다.

안 명창은 유태평양과 나눠 맡는 고혼 역으로 4회 가량 무대에 오른다. 정 감독은 매일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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