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온 연출가 옹켕센 "판소리 어떻게 살릴까 고민했죠"

입력 : 2016.10.25 14:19
국립창극단 신작 '트로이의 연인들' 공동 제작
불필요한 음악적 요소 걷고 '미니멀리즘'추구
11월 국립극장 공연후 내년 싱가포르 축제로

“단지 과거의 유산을 따라가는 여정이 아닙니다. 판소리와 창극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본연을 찾아가는 과정이죠.”

싱가포르의 세계적인 연출가인 옹켕센은 24일 오전 국립극장에서 열린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국립창극단 신작 창극 ‘트로이의 연인들’ 간담회에서 “창극이 오래된 집이라면, 여러 겹으로 칠해져 있는 페인트를 하나씩 벗겨서 그 집의 원래 모습을 되찾겠다”고 말했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국립극장과 싱가포르예술축제가 공동 제작한다. 기원전 1350년에서 110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트로이 전쟁 관련 신화와 전설이 기반이다.

헤큐바,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헬레네로 대표되는 네 명의 여인들이 벼랑 끝에서 선택하는 각기 다른 감정과 삶의 방식을 그린다.

‘한국적 말맛’을 살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배삼식 작가가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의 여인들’(기원전 415)과 장 폴 사르트르가 개작한 동명 작품(1965)을 바탕으로 창극을 위한 극본을 다시 썼다. 고대 그리스와 근현대 프랑스 작가가 공유했던 전쟁의 야만성과 비극은 남아있지만,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전쟁 자체의 끔찍함 대신 운명과 삶에 끊임없이 배반당하고 마지막 순간에도 꿈을 꾸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연출을 맡은 옹켕센은 프랑스 테아트르 드 라 빌·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미국 링컨센터 페스티벌 등 세계 주요 공연장과 축제에서 러브콜을 받아왔다.

특히 동서양의 다양한 전통예술을 조화롭게 무대에 올리는 한편, 원작 본연의 주제를 특유의 미장센으로 옮기는 연출가로 정평이 났다. ‘트로이의 여인들’을 통해 처음으로 창극에 도전한다.

그가 이번에 내세운 콘셉트는 ‘미니멀리즘’이다. 무대 뿐 아니라 판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려는 선택으로 불필요한 음악적인 요소들을 걷어내겠다는 계획이다.

“한명의 이야기꾼과 한명의 고수가 함께 하는 판소리 형식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한명의 창자와 하나의 악기가 만나는 실험을 했죠.”

작곡과 음악감독을 맡은 서양 대중음악 기반의 뮤지션 정재일은 “창극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처음에는 망설였다”면서도 “판소리의 원형에 다가간다는 연출님의 말씀에 끌렸다. 연극과 미술 작업을 하면서 실험했던 공간과 요소들로 도와줄 수 있면 판소리가 빛날 수도 잇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옹캉센 연출이 한국 전통 음악을 처음 접한 건 1998년이다. 당시 ‘플라잉 서커스 프로젝트’의 리서치를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원일이 이끄는 국악그룹 ‘푸리’의 가객 강권순을 만났고 지금은 고인이 된 문화기획자 강준혁과 함께 남도지방을 여행하면서 사물놀이와 만신 김금화의 굿판을 접했다. 무엇보다 명창 안숙선이 출연한 임진택 연출의 국립창극단 ‘춘향전’을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안 명창은 이번 ‘트로이의 여인들’에 작창으로 참여한다.

2년 전 의뢰를 받은 뒤 ‘오늘날 창극과 판소리의 의미’가 무엇일지 대해 생각해봤다는 옹켕센 연출은 “전통을 어떻게 동시대에 녹여내는가가 중요하다”며 “몇백년 또는 천년이 지나고도 우리를 매료시키는 작품이 어떻게 가능할 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여러 요소가 겹칠 때 옹켕센 연출이 정리하는 비법은 ‘핵심적인 요소의 깊이’를 찾는 것이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판소리의 깊이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제게는 노래들이 미래로 어떻게 걸어가느냐가 중요해요. 판소리에는 미래를 위한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오랜 전통에서 나온 씨앗이기 때문에 300년 이후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죠. 개념적으로 판소리가 미래에 어떤 모습이 될까 고민하는 지점도 있습니다. 음악이 함께 가는 극이 아니라 드라마가 붙은 콘서트가 될 듯해요.”

‘왜 ’트로이의 여인들‘인가라는 질문에는 “그리스에도 이런 형태(창극)의 극이 존재했다”고 답했다. “서사극의 형태죠. 판소리의 강렬하고 감정이 넘치는 부분이 서사극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몇천년전의 영감을 토대로 얻어진 텍스트를 지금의 창자가 부르는 것이 뜻깊죠.”

전쟁을 겪는 여인들이 어떻게 살고 고군분투를 하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서울에서 제가 묵고 숙소 근처가 일본대사관이라 위안부 소녀상을 볼 수 있어요. 전쟁을 겪은 여인들이죠. 그래서 이 작품이 한국에 더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배삼식 작가는 “인간의 지혜와 밝음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인간의 어리석음과 어두움 그리고 추함”이라며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 받는 걸 가감 없이 들여다보면서 희망을 발견하고 싶다”고 바랐다.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싱가포르 연출가가 창극이라는 양식을 택한 것 자체가 충분히 관심을 끌 만하다”며 “창극단의 예술계로서도 중요한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한다”고 기대했다.

안호상 국립극장 극장장도 “옹켕센 연출은 우리나라 창극 장르에 대한 예술적 양식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고 관심이 있다”며 “아마 해외 축제와 공동으로 창극을 만드는, 의미 있는 첫 번째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헤큐바 김금미, 안드로마케 김지숙, 카산드라 이소연 등 국립창극단 간판들이 모두 출동해 눈길을 끈다. 특히 여자 역인 헬레네 역에 남성 단원이자 곱상한 외모의 창극계 아이돌 김준수가 캐스팅돼 눈길을 끈다.

안무 원후이, 무대디자인 조명희, 의상 장신구 분장디자인 김무홍, 조명디자인 스콧 질린스키, 영상디자인 오스틴 스위처 등 국내외 스태프들도 면면이 화려하다. 오는 11월11일부터 2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 공연 이후 2017년 싱가포르예술축제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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