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무회 40년 '맨발의 김매자'… 춤판 한번 벌여보세

입력 : 2016.10.14 01:01

한국무용 혁신 가져 온 무용가… 포스트극장서 '창무큰춤판' 열어
이노연·김선미·최지연 등 연말까지 춤 공연 잇달아

지난 4일 '창무 큰춤판'이 개막한 서울 창전동 포스트극장. 창무회의 지난 40년을 돌아보는 영상이 흐를 때 원로 무용가 김매자(73)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제자들 젊을 때 얼굴이 나오길래… 갑자기 그 시절이 생각나서 그랬어요. 참 힘든 세월이었네요."

무용가 김매자가 창무회 40년 기념 춤 공연 중인 포스트극장 무대에 앉았다. 40년 전 한국무용계에 파란을 몰고왔을 때처럼 맨발이었다. /김지호 기자
무용가 김매자가 창무회 40년 기념 춤 공연 중인 포스트극장 무대에 앉았다. 40년 전 한국무용계에 파란을 몰고왔을 때처럼 맨발이었다. /김지호 기자
김매자가 이끄는 창무회는 국내 가장 오래된 민간 무용단이다. 그와 제자 200명의 춤 인생이 오롯이 담긴 40년을 기념하는 '창무 큰춤판'은 12월 28일까지 3개월 동안 춤 전용 소극장인 포스트극장에서 열린다. 이노연·김선미·최지연 등 창무회 출신 안무가 20명이 참여하는 춤 공연이 잇달아 무대에 오른다.

그는 서른두 살 때인 1975년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당시 한국무용계서는 '이단'으로 여길 만큼 충격을 안겼다. 맨발로 춤을 춘 것이다. "한국무용을 한다면서 무슨 이사도라 덩컨 흉내를 내느냐"는 식의 비난이 '몰매 맞을 정도로' 쏟아졌다. "한국무용은 한복을 입고 버선을 신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나는 그런 곱기만 한 것들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우리는 흙 위에 발을 딛고 살아온 농경민족이 아닌가?" '꾸민 무용'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솔직하게 나온 무용'을 위해 저고리를 벗어 던지기도 하고 애 업고 밭일을 하는 동작을 표현하기도 했다.

1976년 창무회를 창설한 그는 1985년 신촌역 앞에 있던 한 창고를 개조해 국내 첫 무용 전문 극장 '창무춤터'를 만들었고, 1993년에는 창전동에 포스트극장과 무용 도서관·스튜디오를 위한 7층 건물을 세워 이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무용 타워'라는 큰 꿈이었다. 달마다 춤 전문지 '몸'을 냈고 해마다 '창무국제공연예술제'를 열었다.

하지만 1991년 입시 부정 사건에 연루돼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 재정적인 어려움이 계속됐다. 공연과 강의로 번 돈을 모두 쏟아붓고 팬클럽인 '창무품회원'의 도움을 십시일반 받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1990년대엔 제2금융권 대출을 받다가 한때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다. '신불'은 면해야겠기에 눈물을 머금고 한 층씩 건물을 팔았고, 이제 지하의 포스트극장마저 빌려 쓰는 상태다. "100평이 채 안 되는데도 무대를 넓게 설계해 무용 공연에 최적화한 곳이다. 여기 하나 남은 건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창고나 술집이 되진 않을지…."

그에겐 '춤에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지론이 있다. '창무이즘'이라고도 불리는 그 철학은 '혼존(混存)'이다. 흩어지면서 모이는 '헤쳐 모여'이자 다르면서도 같아지는 '구동존이(求同存異)'와도 통한다. 이번 '창무 큰춤판' 중 직접 무대에 서는 12월 27일의 '춤본―하늘·땅·인간' 공연은 그런 사상을 담은 대표적인 춤이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고 싶지만, 내가 균형을 못 잡으면 끌어내리라고 제자들한테 말해 뒀다."

▷'창무 큰춤판' 12월 28일까지 포스트극장, (02)337-5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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