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고독한 남자, 우리 이야기

입력 : 2016.09.30 09:57
창작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창작 초연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에서 작가를 꿈꾸는 제주 소년 ‘나선호’에게 그의 여동생이 묻는다.

'소설이 뭐냐'. 선호는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야.” 나선호는 ‘썬샤인의 전사들’ 속 베스트셀러 작가 한승우가 만든 그의 분신이다.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64년생인 그는 부채의식에 시달리고 있다.

빨갱이 잡는 군인 출신 고문 전문가로 악의 연대기라 할 만한 ‘강종양’ 탓에 비겁의 기억을 갖게 된 그는 이를 씻고자 필명인 ‘한승우’로 산다.

그는 우물을 홀로 찾아간 사나이가 스스로를 미워할 줄 아는 윤동주의 ‘자화상’을 외우는, 순수하고 정직한 작가를 꿈꾸는 대학생이었다.

치사함의 기억을 겨우 접고,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일상 속에 담긴 인간의 고독을 포착하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됐다.

하지만 3년 전 K타워 붕괴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은 뒤, 펜을 들지 못하고 있다. 가장 아끼는 사람을 잃은 그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써나가는 과정이 ‘썬샤인의 전사들’의 골격이다.

한승우는 그런데 실제 이 작품을 쓴 실존 극작가 김은성의 분신이기도 하다. 극 밖의 극, 그 극의 실제 밖은 에셔의 도마뱀을 그리는 그림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얽히고 설킨다.

‘목란언니’ 등을 통해 동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되새겨온 김 작가는 ‘썬샤인의 전사들’에서 작심한 듯하다.

일본군 위안부, 제주 4·3사건, 6·25 동란, 군부독재시대와 그리고 세월호 참사까지 아우르는 그의 필력은 정직하되 지루하지 않다.

작가가 꿈이던 카투사 소년병 선호의 수첩이, 화가가 되고 싶던 조선족 중공군 호룡, 시를 쓰는 인민군 군의관 시자, 시자의 동생이자 시인이며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시춘에게 연결되는 퍼즐 같은 극적 구성도 촘촘하다.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이야기는 그렇게 새롭게 또 생명력을 얻는다. 극 중에서 시춘이 쓴 희곡의 제목은 ‘작가들’. 각자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모든 개인은 작가일지 모른다. 악당 블랙트라에 맞서는 산드라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한승우가 상상 속에서 만나는 딸도 마찬가지다.

개별 이야기가 공감대를 얻어 우리 이야기가 되는 순간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 연극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다.

연극이라는 것이 인생을 갑자기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썬샤인의 전사들’을 본 관객들은 그 무엇이 조금 달라져 있는 것을 느낄수 있다. 선호가 전쟁통에 만나 막사 탄환 상자에 숨겨 놓은 순이가 뚜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극 중 내내 들린다. 누군가는 그렇게 여전히 갇혀 있고 두드린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썬샤인의 전사들’은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인 김 작가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다. 포스터에도 배우의 얼굴이 아닌 그의 얼굴 사진이 박혀 있다.

170분간 대한민국의 아픔을 따듯한 시선으로 어루만지면서도 우직하고 정직하게 톺아보는 그의 필력에 박수를 보낸다. 연출가 부새롬의 연극적이면서도 동화적인 연출, 인디음악 신에서 기억해야 할 가수 최고은과 그녀의 음반 프로듀서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황현우의 잔잔하게 여운을 남기는 음악도 기억해야 한다. 10월2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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