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소리는 보고 만지는 예술"

입력 : 2016.09.19 01:40

[청각장애 사운드 아티스트, 재미교포 크리스틴 선 김]

"선천적으로 듣지 못하지만 나만의 인지 방식으로 작품 제작"
미디어시티서울 2016 참여… 작년 TED 강연자로 나서기도

“경청해 보세요.” 크리스틴 선 김이 서울시립미술관 3층에 설치된 자신의 작품 ‘기술을 요하는 게임 2.0’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남강호 기자
작은 몸집의 여인이 눈짓, 손짓, 몸짓을 버무려 온몸으로 말을 걸었다. "여기 선에다 안테나를 대고 걸어보세요. 속도를 잘 맞추면 할머니 목소리가 들릴 거예요." 수화(手話) 통역자를 거쳐 비로소 그녀 설명이 전달됐다.

지시대로 라디오 모양 장치에 붙은 안테나를 빨랫줄처럼 매달린 선에 대고 서서히 움직였다. "찌지지직." 사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잡음에 가려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자 그녀의 가녀린 손이 다시 바삐 움직였다. "요령이 필요해요. 그래서 작품 제목이 '기술을 요하는 게임 2.0'이랍니다."

재미교포 작가 크리스틴 선 김(36)은 선천적으로 소리를 못 듣지만 소리로 작품을 만드는 '사운드 아티스트(sound artist)'다. 그림 그리는 청각장애인 작가는 꽤 있어도, 소리 다루는 청각장애인 작가는 드물기에 요즘 그녀는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TED' 강연자로 나섰다. 뉴욕 휘트니미술관·MoMA(뉴욕 현대미술관) PS1 등에서 전시했다. 다음 달엔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강연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미디어시티서울 2016'에 참여해 'SeMA―하나 미디어아트어워드'를 받은 그녀를 최근 만났다.

"소리는 제 삶과는 무관한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듣지는 못해도 소리가 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소리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아 예술에 쓰기로 했어요."

처음부터 소리와 대면한 건 아니다. 1980년 캘리포니아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로체스터 공대,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에서 공부한 뒤 회화 작업을 했다. 2008년 독일 베를린에서 작가 창작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미술관에 갔더니 '시각 예술'은 없고 어딜 가든 '소리'밖에 없었어요. 사운드 아트가 막 유행할 때였거든요. 벽에 쾅 부딪힌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나만의 소리 인지 방식을 작품으로 만들 수도 있겠다 싶은 거예요."

'소리는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고 만질 수도 있다'는 걸 퍼포먼스로 보여줬다. 거리에서 채집한 소음을 증폭 장치에 연결해 진동을 느끼게 했다. 드럼 위에 물감 묻은 붓을 올려두고 진동에 따라 물감이 번지게 했다.

시립미술관에 전시된 '기술을 요하는 게임 2.0'은 '미래'와 관련된 짧은 문장을 특정인이 읽게 하고 녹음했다. 기술자의 도움을 얻어 만든 특수 도구를 선에 갖다 대고 일정 속도로 걸으면 녹음된 내용이 들린다. 이번 낭독자는 1970년대 후반 미국에 이민 온 그녀의 할머니다. 작품에 처음 가족을 등장시켰다. "한국이 제겐 '가족'의 다른 말 같거든요."

아버지는 보험 설계사, 어머니는 간호사로 일하신다. 심리 상담사로 일하는 언니도 청각장애인이다. "부모님이 영어를 못하셨는데 언니하고 저 때문에 수화, 영어를 동시에 배우셨어요. 얼마나 힘드셨을지. 우리 가족은 정말 끈끈해요. 제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큭!' 가느다란 웃음이 새어나왔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