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스페인에 취하는 '건반 위의 求道者'

입력 : 2016.05.12 03:00

[피아니스트 백건우]

첫 내한 스페인내셔널오케스트라와 파야의 '스페인 정원의 밤' 협연
라벨의 협주곡 G장조도 선보여

'건반 위의 구도자(求道者)' 백건우(70)가 올여름 스페인 음악에 취한다. 7월 처음 내한하는 스페인 내셔널 오케스트라(ONE)와 스페인 대표 작곡가인 마누엘 데 파야(1876~1946)의 '스페인 정원의 밤'을 협연한다.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도 함께 선보인다. 지휘자는 스페인 마요르카 출신의 안토니오 멘데스다.

지난 10일 서울 한남동 일신홀에서 만난 백건우에게 화려한 색채와 뜨거운 정열로 번뜩이는 라틴 음악을 어떻게 펼쳐낼지 상상이 안 된다고 했더니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라고 했다. 아내이자 배우인 윤정희가 거들었다. "뭔가에 꽂히면 푹 빠져서 주변 모든 걸 경험하고 이해하고 즐기는 사람이에요."

지난 10일 서울 한남동 일신홀에서 만난 백건우는 연습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곁에는 아내 윤정희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아내는 음악 감상이 취미이고, 나는 영화 감상이 취미이니까.” 집에서도 아내가 밥을 하면 남편은 장에 가 반찬거리를 사온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 /고운호 객원기자
지난 10일 서울 한남동 일신홀에서 만난 백건우는 연습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곁에는 아내 윤정희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아내는 음악 감상이 취미이고, 나는 영화 감상이 취미이니까.” 집에서도 아내가 밥을 하면 남편은 장에 가 반찬거리를 사온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 /고운호 객원기자

가는 데마다 사 모은 스페인 작곡가들의 피아노 악보만 2000쪽이 넘는다고 했다. 그간 함부로 손을 못 댄 이유는 "좋은 작품이 많아 충분히 돌아본 뒤에 프로그램을 짜고 싶어서였다"고. 백건우는 "몇 년 전 알람브라 궁전에 갔다가 그라나다에서 우연히 찾은 파야의 생가를 잊지 못한다"며 말을 이었다.

"집이 아주 작았어요. 그 조그만 방에서 파야와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눴더군요. 놀랐죠. 침실에도 침대와 십자가만 있어 수도원 같았는데, 집주인이 그처럼 풍요로운 음악을 일궈낸 바탕은 뭐였을까 궁금했어요. 스페인 남부 카디스에서 태어나 스페인 음악의 대부인 펠리페 페드렐에게 작곡을 배운 파야는 그 후 파리에서 드뷔시 등 19세기 말 프랑스의 세련과 번영을 넘치게 흡수했고, 그걸 스페인 민속 음악에 녹여 예술로 발전시켰어요."

서울에서 태어나 6·25 때 부산으로 피난했던 백건우는 이웃 아이들한테만 피아노를 가르쳐주던 어머니 어깨너머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유치원 보모를 하면서 레슨까지 하다 보니 저한테 가르쳐줄 시간이 없었어요." 레슨이 끝나면, 그래서 피아노가 비면 일곱 살 소년은 피아노 앞에 홀로 앉아 제 힘으로 초급 과정인 바이엘을 떼고 체르니를 깨쳤다.

그는 비디오테이프 1500개에 영화 3000편을 녹화 뜬 영화광이다.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그린 자화상을 150달러에 팔아 생활비로 썼을 만큼 그림에도 조예가 깊다. 아내가 집에서 밥을 안칠 동안, 걸어서 5분 거리인 시장에 가서 맘에 드는 식재료를 사들고 와 음식을 만들 만큼 요리도 잘한다. "나는 악보만 갖고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영화, 여행, 책 그런 데서 더 많은 걸 배워요."

오는 9월 29일엔 예술의전당에서 오래 사랑해준 팬들을 위한 리사이틀 '선물'도 연다. "치고 싶은 곡이 너무 많아 관객들로부터 듣고 싶은 곡을 설문조사해 볼까 고려 중"이다. 지휘자나 대학교수, 축제의 음악감독처럼 다른 활동을 추가하는 연주자도 많지만 그는 오로지 피아노에 집중한다. "날마다 새로우니까. 오늘 아침에도 쇼팽의 스케르초 악보를 들여다보는데 달리 보여서 운지법을 바꿨어요. 내 것이 될 것 같으면서도 완성이 안 되는 거지. 해도 해도 답을 좀 얻었으면 싶은데 한편 그게 행복한 거라."

열 살 소년의 얼굴로 첫 콘서트를 가진 지 60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무대에 서면 떨린다"는 그다. 지난해 6월 예술의전당에서 드레스덴 필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할 때다. 무대에 오르기 바로 전, 백건우는 기획사 빈체로의 송재영 부장을 돌아보며 "아직도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송 부장이 웃으며 농을 던졌다. "돌아가실 때면 아실 것 같으세요?" "그러네." 피아니스트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묵묵히 무대로 걸어나갔다. 노련한 노장에게도 배움은 끝이 없다.

스페인 내셔널 오케스트라 첫 내한공연=7월 17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2)599-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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