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국서 극단 76단 상임연출 "연극 40년 하다보니 배우 궁금했어요"

입력 : 2016.04.28 09:48
1976년 창단한 극단 '76단'이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예술감독 겸 상임 연출인 기국서(64)·배우 기주봉(61) 형제가 이끌어온, 대학로 시대의 문을 연 단체다. 무용평론가 김태원, 송승환 PMC프러덕션 대표 등도 창단 멤버다.

극작가도 겸하는 기 연출은 특히 '관객모독' '미친 리어' '햄릿' 시리즈 등 문제작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대표적인 연극 실험가로 떠올랐다.

극단 76단 창단 40주년 기념공연의 첫번째 작품인 '리어의 역 役, 逆' 역시 마찬가지다. 40년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타이틀롤을 연기하다 은퇴한 노배우가 주인공이다. 기 연출은 무대 위 배우의 눈을 통해 여전히 세상과 무대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

기 연출은 27일 오후 서울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열린 '리어의 역' 간담회에서 "연출로서 연극을 40년 하다 보니 배우가 궁금해졌다"며 "나이 든 배우의 감회가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연극 '리어의 역'의 극중 노배우 곁도 셰익스피어의 원작처럼 세 명의 딸과 40년을 함께한 광대 역의 배우가 지키고 있다.

치매에 걸린 그는 광기로 외면받고 있다. 피붙이나 후배들도 그의 삶과 연극 유산에만 집착한다. 노배우는 자신의 이름을 딴 극장을 떠나지 않고 그 지하에서 살아간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리어의 대사들과 그를 바라보던 관객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다. 지켜내지 못한 시간과 사람, 무대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 가득하다.

기 연출은 '리어의 역'을 쓸 때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계속 생겼다. 그 분들의 정신, 마음이 궁금하더라. 그래서 희곡을 썼다. 어머니도 치매로 돌아가셨는데 어떤 정신일까 궁금했다. 뇌가 파괴되는 거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세계가 보이지 않을까 했다."

처음에는 리어 역을 맡은 노배우의 1인극으로 만들려고 했다. 광대를 투입하기로 하면서 2인극도 고민했지만 "관념적으로 끝날 것 같아 원작처럼 세 딸까지 등장시켰다"고 했다. "재산 분배 등은 지금 현실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극단 76의 신작은 '햄릿6-삼양동 국회 옆에서' 이후 4년 만이다. 기 연출은 그사이 정체돼 있었다고 고백했다. "살면서 어두울 때가 있고, 맴돌 때가 있다. 계속 창조적인 일을 하고 돈 벌고 노동을 하지만 2, 3년은 정체됐다. 즐거움이라는 걸 모르고, 눈 뜨면 늘 울고. 타개책은 없고 게으르기도 하지만 방법을 모르고. 그런 세월을 2년 가량 보냈다."

하지만 "동네에서 나이든 양반, 전철에서 힘 없이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볼 때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지금은 활발하지만 공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올 거다. 그것을 그대로 극화해보자, 공감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니까. 광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부분은 배우가 하고 싶은, 영역이니까. 그렇게 극이 완성됐다."

연극인들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지만 일반 대중의 공감이 어렵지 않겠냐는 물음에 "관념적인 말이 많아서 그런 것은 각오했다"고 웃었다. "흥행사적인 기질은 없다. 내 연극 경험을 다루니까. 그럴 수 밖에 없겠다. 그러나 노력을 했다. 광대에게 자유로운 말과 행동을 부여했다."

극단 76은 연희단거리패, 학전, 연우무대 등과 함께 대학로 연극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상업적인 연극이 점차 들끓기 시작하면서 힘든 때가 있었다. "경제적인 것은 그러려니 해서 욕심은 안 낸다"고 웃었다. 대신 "소통이 안 되면, 힘들다"고 했다. "관객의 외면을 받으면 비참해진다"는 것이다.

아울러 "복잡하지만 한국 연극이 나라의 지원을 받을 기회가 많이 열려 있는데 나와 같은 나이에는 거기에 의존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자존심도 있고 게으르기도 하고. 젊은 팀들하고 같이 줄 서 있는 게 싫었다."

'리어의 역'의 역은 중의적이다. 부리다는 뜻의 역(役), 거스르다라는 뜻의 역(逆)이 함께 포함됐다.

기 연출은 우선 "'리어의 역'을 레퍼토리화하는 것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후에 "엄청 웃기는 것을 쓰고 싶은데 어려울 것 같다. 근데 코미디를 한 번쯤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눈을 빛냈다.

극단 목화레퍼토리컴퍼니에 몸담은 배우 홍원기가 노배우를 연기한다. 초반 30여분에 걸친 독백 무대가 일품이다. 광대는 김왕근이 연기한다. 이전 이 역을 맡은 배우가 개막 일주일 전에 건강 문제로 하차하면서 5일 만에 모든 대본을 배웠다.

5월8일까지 선돌극장. 6월 1~5일 대학로 게릴라극장. 밝남희, 고수민, 김태라, 황보란. 3만원. 잘한다프로젝트. 070-7664-8648

한편 76단의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76단 출신의 후배 연출가들도 힘을 보탠다. 극단 곡목길의 박근형 대표의 '죽이 되든, 밥이 되든'(5월18~29일 게릴라극장), 김낙형 극단 죽죽 대표의 '붉은 매미'(6월8~12일 게릴라극장)가 뒤이어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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