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호서 찍은 작품, 디자이너 카트란주가 표절"

입력 : 2016.04.19 03:00   |   수정 : 2016.04.19 04:21

- 사진가 이명호 작품 '나무…#3' 해외 유명 패션디자이너 표절 논란
"반팔 셔츠·가방에 무단 도용" 美 연방법원서 저작권 침해 소송
"2012년 작업 후 시화호 정비로 같은 구도의 장면 나올 수 없어"

"1년 전 알고 지내던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이 마리 카트란주라는 패션디자이너 팬인데 협업하셨느냐며 축하 인사를 건네오더군요. 제 사진이 들어 있는 가방을 봤다면서.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어요."

18일 서울 사간동 한 카페에서 사진작가 이명호(41·경일대 교수·사진)씨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2004년부터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설치해 마치 캔버스 위에 나무를 그린 듯한 분위기의 사진 연작을 선보여온 작가다. 미국·중국·두바이 등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해 왔고, 2011년 미국 LA의 장 폴 게티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며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이 작가는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패션디자이너 마리 카트란주가 자신의 'Mary′s A to Z' 컬렉션 중 '알파벳 T'에 해당하는 제품(토트백과 반팔 상의) 디자인에 내 작품 '나무…#3'(2013년작)의 이미지 일부를 무단으로 도용 및 변형해 사용했다"며 "지난해 10월 19일 마리 카트란주를 상대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지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간담회에 동석한 법무법인 정세 김형진 변호사는 "7월쯤 재판이 시작될 예정"이라며 "저작권 침해에 대한 인정과 손해배상, 제품 판매 및 홍보 중단을 요구했으며 손해배상 청구액은 200만달러(약 23억원)"라고 덧붙였다.

마리 카트란주(33)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그리스 출신 유명 패션디자이너. 디지털 프린트를 활용한 스타일이 특징이며 아디다스와의 협업 등으로 명성을 쌓았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토트백과 반팔 상의엔 이 작가가 2012년 시화호 갈대밭에서 촬영한 것과 유사한 이미지의 일부가 프린트돼 있다. 이 작가는 "내가 작업한 뒤 시화호 갈대밭이 정비돼 같은 장면을 찍을 수 없다. 디자이너가 2012년 이전에 가지 않은 이상 이 구도는 나올 수 없으므로 명백한 표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표절 의혹을 비켜가기 위해 포토샵 등으로 나무를 좌우로 늘린 것처럼 보인다"고 덧붙였다.

사진가 이명호의 2013년 사진 작품‘나무…#3’. 시화호 갈대밭에 있는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세워 그림처럼 표현했다. /이명호 제공
사진가 이명호의 2013년 사진 작품‘나무…#3’. 시화호 갈대밭에 있는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세워 그림처럼 표현했다. /이명호 제공
이명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패션 디자이너 마리 카트란주의 토트백(왼쪽)과 반팔 셔츠.‘ 나무…#3’일부를 떼낸 것 같은 이미지가 들어있다.
이명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패션 디자이너 마리 카트란주의 토트백(왼쪽)과 반팔 셔츠.‘ 나무…#3’일부를 떼낸 것 같은 이미지가 들어있다.
논란이 된 토트백은 지난해 영국의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795유로(약 103만원), 반팔 셔츠는 디자이너 홈페이지에서 520달러(약 60만원)에 판매됐지만 현재는 삭제된 상태다. 국내에선 서울 청담동 명품 편집 매장 '10 꼬르소 꼬모'에서도 팔렸다. 이 작가의 해당 작품은 미술 시장에서 2만달러(약 2300만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김 변호사는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가 사진가의 생명과도 같은 표현 방식을 표절해 유럽 전역과 미국에 판매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느낀다"며 "그간 국내에선 '차용 미술'(기존 작품의 이미지를 활용해 만든 작품)과 표절의 범위를 다룬 판례가 충분하지 않은 만큼 중요한 선례를 남기기 위해 소송을 하게 됐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과 관련, "제품 판매가 주로 미국에서 이뤄졌고, 미국에 저작권 관련 유사 판례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쟁점은 '디자이너가 이 작가의 작품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는가'와 '동일 또는 유사 작품인가' 두 가지다.

이번 사건은 지난 2014년 영국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와 대한항공 사이에서 벌어졌던 '솔섬' 표절 공방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케나 측이 국내 법원에 대한항공을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벌였으나 법원은 "자연물을 촬영한 풍경 사진의 앵글과 구도에는 저작권이 없다"며 대한항공의 손을 들어줬다. 김 변호사는 "이 작가의 작품은 일반적 풍경 같지만, 캔버스가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며 "솔섬 사건과 달리 표절 여부를 판단할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 한 사진 비평가는 "작가의 저작권 보호 차원에선 의미가 있지만, 작가가 지명도를 높이는 데 표절 시비를 이벤트처럼 활용한다는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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