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4.14 09:32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연극계에서 바로 그 '왕관'의 중독성, 연민, 그리고 치졸함을 다룬 연극 세 편이 주목 받고 있다.
◇헨리 4세 파트1 & 파트2-왕자와 폴스타프
세종문화회관 산하단체인 서울시극단이 2002년 국내 초연한 뒤 14년 만에 다시 선보이고 있다. 객원으로 초연을 지휘한 데 이어 다시 연출을 맡은 김광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의 미니멀리즘은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4륜 구동차에 태운 듯 멋스러움과 함께 속도감까지 선사한다.
원작대로 하면 러닝타임이 5시간이 훌쩍 넘는다. 비디오 플레이어의 빨리감기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약 2시간40분으로 압축했다. 덕분에 밀도감이 높아졌다. 리처드 2세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영국 왕 헨리 4세가 왕관에 극도로 집착하는 심리적 변화가 다이내믹해졌다. 권력을 향한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왕자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허풍쟁이 궤변가 '폴스타프'와 어울려 밑바닥 삶을 체험하면서 온갖 기행과 방탕을 일삼는다. 하지만 반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는 그가 부친이 잠시 쓰러진 틈을 타 왕관을 제 머리에 얹을 때, 그 무거움은 기꺼이 감당하고픈 것이 된다.
그 무거운 정도를 대수롭지 않게 만드는 이는 폴스타프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는 햄릿이 있고, 희극에는 샤일록이 있으며, 사극에는 폴스타프'가 있다. 헨리 왕자가 즉위한 뒤 버림받는 드라마틱한 면도 갖춘 그는 뚱뚱하고 늙은 술고래에 난봉꾼이지만 권력의 위선을 통렬히 조롱한다. 서울시극단 단원 이창직의 능수능란함은 폴스타프를 펄떡이게 만든다.
대학로에서 다방면의 작업에 참여하는 오세혁 작가가 각색했는데 그는 청년 문제에 관심이 크다. '헨리 4세'에서 세대 갈등도 도드라지는 이유다. 왕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면 충분히 왕이 될 만한 능력과 재주가 많은 젊은이인 홋스퍼는 권력의 무게감을 지난하게 지키려는 이들로 인해 사라져갔다. 14일까지 세종M시어터. 2만~5만원. 세종문화티켓. 02-399-1000
◇햄릿아비
이성열 연출이 이끄는 극단 백수광부가 창단 20주년 기념 첫번째 공연으로 선보인 새 공동창작극 '햄릿 아비'에서 왕관의 주인은 셰익스피어 '햄릿' 속 햄릿의 아버지다. 자신의 동생에게 억울하게 시해된 원혼이다. 따라서 그의 왕관은 연민이다. 원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햄릿아비'는 이 시대의 햄릿아비, 즉 원혼은 누구일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백수광부 단원들은 공동창작극의 특징을 살려 여러 시선으로 시대의 아픔들을 빠짐없이 무대 위에 기록한다.
햄릿이 어느 날 밤 열차를 타고 알 수 없는 곳들을 떠돌며 만나는 상황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질곡의 역사다. 권력을 잡은 이의 사관에 따라 과거의 역사가 다시 쓰여지고, 고등학생은 빨갱이를 잡겠다며 도시락 폭탄을 만든다. 그 고등학생은 정치, 연예뿐 아니라 연극계 가릴 것 없이 진보인사들의 실명을 거듭하며 거침 없이 욕을 내뱉는다.
2년 전 죽은 딸을 위해 생일잔치를 벌이는 부모의 모습에서 '세월호 참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게 만든다. 극 속에서 잠시 빠져 나온 배우들은 지난해 연극계에 분 검열 광풍 등의 논란에 대해 거침 없이 털어놓기도 한다. 진짜 왕관(王冠)을 쓴 이들로 인해 햄릿아비들의 왕관은 관(棺)밖에 될 수 없다. '제37회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중 하나다. 17일까지 대학로 SH아트홀. 3만원. 극단 백수광부. 02-813-1674
◇보도지침
5공화국 시절 매일 아침 언론사에 은밀히 전달된 보도지침을 다룬 '보도지침'에서 왕관을 쓴 이들은 지침을 내리는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국민들의 눈, 귀, 입을 틀어막기 위해 치졸함으로 점철된 왕관을 움켜잡고자 했다.
연극은 당시 보도지침을 수용하지 않은 몇몇 언론인이 뜻을 같이 해 월간 '말'에 보도지침을 폭로한 실화가 바탕이다. 이 재판 과정을 다룬 법정드라마다. 내용은 상당히 각색됐다. 재판에 연루된 실제인물들 간의 관계와 설정을 연극적으로 꾸몄다.
실존 인물인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기자 '주혁', '말'지를 연상케하는 '독백'의 발행인 '정배', 변호사 '승욱', 검사 '돈결'은 모두 대학시절 연극반을 같이 한 절친한 친구다. 가장 진보적이던 돈결은 보도지침을 폭로한 주혁과 정배를 기소하려 든다. 승욱은 두 사람을 변호한다. 판사 '원달'은 이들의 대학 스승이자 연극반 선배였다. 법정은 결국 이들 관계의 역사적 집결지다.
블랙코미디와 엄숙함이 깃든 법정 신과 유쾌함과 문제 의식을 갖게 되는 대학 동아리 신을 오가며 긴장과 이완을 조절한다. 끊임없이 대사를 쏟아내는 주혁 역의 송용진, 승욱 역의 이명행 등 배우들의 열연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자신이 수감된 상황에서 동료들이 대신 차린 돌상을 받은 딸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한다는 주혁의 바람은 심장을 파고든다.
변정주 연출의 풍자적이면서 고루하지 않고, 재기발랄하면서 가볍지 않은 터치는 세련됐다. 특히 사건의 본질과 함께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부분은 현재를 투영케 한다.
다만 '보도지침'은 제작사 대표가 대학로의 주관객층인 20, 30대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으로 홍역을 치렀고 일부 관객은 보이콧 중이다. '보도지침'에서는 '연극은 시대의 정신'이라는 말이 수차례 반복된다. 일부 소비패턴의 흐름을 뭉뚱그린 제작사 대표는 시대의 정신을 잘못 읽는 오류를 범했지만, 이로 인해 연극 자체가 추구하는 정신까지 퇴색시키기에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가 아깝다. 1986년 문성근·강신일을 내세워 400여회 공연하는 동안 서울에서만 5만여명의 관객을 모은 '칠수와 만수'처럼, 연극을 통해 졸렬한 권력에 통렬함을 느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6월19일까지 대학로 수현재시어터. 극작 오세혁, 러닝타임 110분. 5만원. 엘에스엠컴퍼니. 02-2644-4558
◇헨리 4세 파트1 & 파트2-왕자와 폴스타프
세종문화회관 산하단체인 서울시극단이 2002년 국내 초연한 뒤 14년 만에 다시 선보이고 있다. 객원으로 초연을 지휘한 데 이어 다시 연출을 맡은 김광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의 미니멀리즘은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4륜 구동차에 태운 듯 멋스러움과 함께 속도감까지 선사한다.
원작대로 하면 러닝타임이 5시간이 훌쩍 넘는다. 비디오 플레이어의 빨리감기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약 2시간40분으로 압축했다. 덕분에 밀도감이 높아졌다. 리처드 2세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영국 왕 헨리 4세가 왕관에 극도로 집착하는 심리적 변화가 다이내믹해졌다. 권력을 향한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왕자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허풍쟁이 궤변가 '폴스타프'와 어울려 밑바닥 삶을 체험하면서 온갖 기행과 방탕을 일삼는다. 하지만 반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는 그가 부친이 잠시 쓰러진 틈을 타 왕관을 제 머리에 얹을 때, 그 무거움은 기꺼이 감당하고픈 것이 된다.
그 무거운 정도를 대수롭지 않게 만드는 이는 폴스타프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는 햄릿이 있고, 희극에는 샤일록이 있으며, 사극에는 폴스타프'가 있다. 헨리 왕자가 즉위한 뒤 버림받는 드라마틱한 면도 갖춘 그는 뚱뚱하고 늙은 술고래에 난봉꾼이지만 권력의 위선을 통렬히 조롱한다. 서울시극단 단원 이창직의 능수능란함은 폴스타프를 펄떡이게 만든다.
대학로에서 다방면의 작업에 참여하는 오세혁 작가가 각색했는데 그는 청년 문제에 관심이 크다. '헨리 4세'에서 세대 갈등도 도드라지는 이유다. 왕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면 충분히 왕이 될 만한 능력과 재주가 많은 젊은이인 홋스퍼는 권력의 무게감을 지난하게 지키려는 이들로 인해 사라져갔다. 14일까지 세종M시어터. 2만~5만원. 세종문화티켓. 02-399-1000
◇햄릿아비
이성열 연출이 이끄는 극단 백수광부가 창단 20주년 기념 첫번째 공연으로 선보인 새 공동창작극 '햄릿 아비'에서 왕관의 주인은 셰익스피어 '햄릿' 속 햄릿의 아버지다. 자신의 동생에게 억울하게 시해된 원혼이다. 따라서 그의 왕관은 연민이다. 원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햄릿아비'는 이 시대의 햄릿아비, 즉 원혼은 누구일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백수광부 단원들은 공동창작극의 특징을 살려 여러 시선으로 시대의 아픔들을 빠짐없이 무대 위에 기록한다.
햄릿이 어느 날 밤 열차를 타고 알 수 없는 곳들을 떠돌며 만나는 상황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질곡의 역사다. 권력을 잡은 이의 사관에 따라 과거의 역사가 다시 쓰여지고, 고등학생은 빨갱이를 잡겠다며 도시락 폭탄을 만든다. 그 고등학생은 정치, 연예뿐 아니라 연극계 가릴 것 없이 진보인사들의 실명을 거듭하며 거침 없이 욕을 내뱉는다.
2년 전 죽은 딸을 위해 생일잔치를 벌이는 부모의 모습에서 '세월호 참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게 만든다. 극 속에서 잠시 빠져 나온 배우들은 지난해 연극계에 분 검열 광풍 등의 논란에 대해 거침 없이 털어놓기도 한다. 진짜 왕관(王冠)을 쓴 이들로 인해 햄릿아비들의 왕관은 관(棺)밖에 될 수 없다. '제37회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중 하나다. 17일까지 대학로 SH아트홀. 3만원. 극단 백수광부. 02-813-1674
◇보도지침
5공화국 시절 매일 아침 언론사에 은밀히 전달된 보도지침을 다룬 '보도지침'에서 왕관을 쓴 이들은 지침을 내리는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국민들의 눈, 귀, 입을 틀어막기 위해 치졸함으로 점철된 왕관을 움켜잡고자 했다.
연극은 당시 보도지침을 수용하지 않은 몇몇 언론인이 뜻을 같이 해 월간 '말'에 보도지침을 폭로한 실화가 바탕이다. 이 재판 과정을 다룬 법정드라마다. 내용은 상당히 각색됐다. 재판에 연루된 실제인물들 간의 관계와 설정을 연극적으로 꾸몄다.
실존 인물인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기자 '주혁', '말'지를 연상케하는 '독백'의 발행인 '정배', 변호사 '승욱', 검사 '돈결'은 모두 대학시절 연극반을 같이 한 절친한 친구다. 가장 진보적이던 돈결은 보도지침을 폭로한 주혁과 정배를 기소하려 든다. 승욱은 두 사람을 변호한다. 판사 '원달'은 이들의 대학 스승이자 연극반 선배였다. 법정은 결국 이들 관계의 역사적 집결지다.
블랙코미디와 엄숙함이 깃든 법정 신과 유쾌함과 문제 의식을 갖게 되는 대학 동아리 신을 오가며 긴장과 이완을 조절한다. 끊임없이 대사를 쏟아내는 주혁 역의 송용진, 승욱 역의 이명행 등 배우들의 열연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자신이 수감된 상황에서 동료들이 대신 차린 돌상을 받은 딸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한다는 주혁의 바람은 심장을 파고든다.
변정주 연출의 풍자적이면서 고루하지 않고, 재기발랄하면서 가볍지 않은 터치는 세련됐다. 특히 사건의 본질과 함께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부분은 현재를 투영케 한다.
다만 '보도지침'은 제작사 대표가 대학로의 주관객층인 20, 30대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으로 홍역을 치렀고 일부 관객은 보이콧 중이다. '보도지침'에서는 '연극은 시대의 정신'이라는 말이 수차례 반복된다. 일부 소비패턴의 흐름을 뭉뚱그린 제작사 대표는 시대의 정신을 잘못 읽는 오류를 범했지만, 이로 인해 연극 자체가 추구하는 정신까지 퇴색시키기에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가 아깝다. 1986년 문성근·강신일을 내세워 400여회 공연하는 동안 서울에서만 5만여명의 관객을 모은 '칠수와 만수'처럼, 연극을 통해 졸렬한 권력에 통렬함을 느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6월19일까지 대학로 수현재시어터. 극작 오세혁, 러닝타임 110분. 5만원. 엘에스엠컴퍼니. 02-2644-4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