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오페라 '미녀와 야수'로 내한한 작곡가 필립 글래스
"제가 입맛대로 고른다기보다는 영화감독들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해볼래?' 제안을 받으면 그제서야 작곡을 시작하는 거예요. 영화음악 작곡이요? 재밌어요. 오페라나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보단 관객을 엄청 끌어모을 수 있는 영화음악을 만드는 게 수익은 훨씬 좋거든요."
여든을 앞둔 작곡가의 솔직한 발언에 웃음이 퍼졌다. 22일 서울 LG아트센터, 자신이 개척한 필름 오페라 '미녀와 야수'를 들고 내한한 작곡가 필립 글래스(Glass·79)는 "영화음악을 흔히 '배경' 음악이라 하지만 잘 만든 영화음악은 그 자체로 메시지를 준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할리우드 감독들한테 얘기하면 반응이 되게 싸늘해요. 예외는 있어요, 마틴 스코세이지. 그는 대사 없이 음악만으로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제게 도움을 청했어요. 박찬욱 감독은 일상에서 쓰는 언어를 남다른 스토리로 빚어내는 능력이 탁월하고요. 그럴 땐 저도 신이 나서 음악만으로도 영화를 그려낼 수 있게 머리를 싸매죠."
글래스는 20세기 미국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꼽히는 작곡가다. 1970년대 단순한 선율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음악을 만들어 '미니멀리즘'이라는 파고를 일으켰다. 교향곡, 협주곡, 현악사중주 등 고전음악도 부지런히 작곡했지만 실험적 음악에 계속 도전해 오늘날 대중음악의 주류가 된 일렉트로닉 음악의 모태를 제공했다. 1980년대부터 '트루먼 쇼'를 비롯, '디 아워스', 박찬욱의 '스토커' 등 영화음악 40여편을 맡아 예술성과 대중성을 거머쥐었다.
소년 시절 글래스는 아버지의 음반 가게에서 시간을 보냈다. "바르토크부터 비틀스까지 갖가지 음반을 섭렵하며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었다"고 했다. "처음에 음악은 언어라고 생각했어요. 수천 명 앞에서 말할 때랑 단둘이 대화할 땐 말투부터 달라지잖아요.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의 음악은 의미는 같아도 표현 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5년 전 새롭게 얻은 해답은 '장소'였다. 몸이 실제로 갈 순 없지만 머리로는 따라갈 수 있는 곳. "서울, 샌프란시스코, 뉴욕처럼 음악은 장소였어요. 음악을 연주하거나 들을 때면 새로운 곳에 방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거든요."
장 콕토의 흑백 무성영화 '미녀와 야수'가 무대에서 상영되는 가운데 글래스가 작곡한 음악이 필립 글래스 앙상블에 의해 연주된다.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 테너, 바리톤 등 성악가 네 명은 영상 속 배우들의 대사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한 그의 영화로 오페라를 만들고 싶었어요. 영상 속 배우들과 무대 위 성악가들이 시공을 뛰어넘어 교감하면서 공연을 완성해가는 모습에 한국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미녀와 야수=23일 오후 8시 LG아트센터, (02)200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