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배우들,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 주역 휩쓸다

입력 : 2016.02.22 03:00   |   수정 : 2016.03.04 14:37

백인 가정교사 '애나' 역으로 지난주 링컨센터 오른 앤 샌더스
아시안계 여성으론 역사상 처음, 왕·왕비·공주역… 모두 한국계

지난 16일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 '왕과 나'가 열린 링컨센터 비비안 보몽 극장. 영국식 악센트가 돋보이는 흑갈색 머리의 여성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면서 무대에 올랐다. 관객들은 익숙지 않은 얼굴의 등장에 고개를 빼 쳐다보거나 공연 안내지에서 배우 프로필을 뒤적였다.

3시간 가까운 공연이 끝난 뒤, 주인공인 영국인 가정교사 역할의 애나 리오노언스를 소개하는 왕의 손짓이 이어졌다.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그녀의 인사에 환호했다. 한국계 배우 앤 샌더스(Sanders)였다. 율 브리너와 데버러 커 주연의 영화(1956년)로 익숙한 뮤지컬 '왕과 나'가 1951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아시아계가 주인공 애나 역을 맡은 것이다. 애나 역을 맡았던 켈리 오하라의 공석으로 얻게 된 16일과 17일(2회) 단 세 번의 무대뿐이었지만, 공연계에선 "아시아계의 한계가 점차 무너지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링컨 센터에서 열리는 ‘왕과 나’ 무대 위에 나란히 선 한국계 배우 4명. /애슐리 박 트위터
링컨 센터에서 열리는 ‘왕과 나’ 무대 위에 나란히 선 한국계 배우 4명. /애슐리 박 트위터
공연전문사이트 '브로드웨이월드' 등은 19일 "앤 샌더스가 브로드웨이 역사를 바꿔놓았다"며 "배우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도, 그녀 스스로에게도 변혁의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이번 공연에서 앙상블(주요 배역을 맡지 않고 합창이나 군무를 하는 배우)을 맡으며 애나 역할의 언더스터디(주연 배우가 휴가이거나 아플 때 대신 맡는 대역)였던 앤 샌더스는 "지난 1월 애나 역을 잠시 맡을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깜짝 놀랐다"며 "영국 발음 전문교사에게 특별훈련을 받고, 마거릿 랜든의 원작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애나 역에 빠져들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극에서 표출되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 갈등을 이미 나 스스로 어릴 적부터 겪고 자랐다"면서 "인종을 뛰어넘어 애나가 보여줬던 겸손한 모습과 무시당하는 이들에 대한 포용력을 폭 깊이 전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지난 16일 뮤지컬 ‘왕과 나’의 주요 배역에 나선 한국계 배우들이 공연 뒤 미소를 짓고 있다. 왼쪽 둘째부터 애슐리 박(텁팀 역), 앤 샌더스(애나), 이동훈(시암 왕), 루시 앤 마일스(티앙 왕비). /앤 샌더스 트위터
지난 16일 뮤지컬 ‘왕과 나’의 주요 배역에 나선 한국계 배우들이 공연 뒤 미소를 짓고 있다. 왼쪽 둘째부터 애슐리 박(텁팀 역), 앤 샌더스(애나), 이동훈(시암 왕), 루시 앤 마일스(티앙 왕비). /앤 샌더스 트위터
한국인 엄마와 폴란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앤 샌더스는 시카고 예술대학과 텍사스 공대에서 연기를 전공하며 뮤지컬 분야에 뛰어들었다. 지난 1994년 '미녀와 야수'로 브로드웨이에 첫발을 들여놓았고, 대타이긴 하지만 아시아계론 처음으로 '미녀와 야수'의 미녀(Belle)를 맡으며 눈길을 끌었다. 이후 브로드웨이 히트뮤지컬 애비뉴 Q(2003~2009)와 IF/THEN(2014~2015) 등을 거쳐 지난해 앙상블 멤버로 '왕과 나'에 합류했다.

지난해 리바이벌 작품으로 '공연예술계의 아카데미상'인 토니상 4개를 수상한 '왕과 나'는 주요 배역들을 한국계가 차지하며 화제가 된 바 있다. 시암 왕에는 하버드 대학 출신이자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이동훈(훈 리)이 이 역할을 따냈다. 초연 때 율 브리너가 시암 왕을 연기했고, 작년엔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로 알려진 일본 배우 와타나베 켄이 나서 화제를 낳은 배역이다. 티앙 왕비에 한국계 혼혈 배우이자 지난해 토니상 여우조연상 수상자인 루시 앤 마일스, 텁팀 공주에 애슐리 박 등이 출연하고 있다. 링컨 센터는 한국계 배우들을 위해 '특별 기자간담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이번에 앤 샌더스가 애나 역할까지 맡으면서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하는 아시아계의 위상이 한층 올라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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