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알폴디, 결국 인간을 위한 도발…셰익스피어 '겨울이야기'

입력 : 2016.01.06 09:45
거대한 공장이 극장으로 탈바꿈했다. 관객들은 한가운데 쌓여 있는 밀짚에 앉아야 한다. 그곳에 괴롭게 앉아 사방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애써 둘러봐야 한다. 그 만큼 괴롭지만 관객이 같이 고생해야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도발적이고 저항적인 작품으로 호평 받고 있는 헝가리 연출가 로버트 알폴디(48)가 2012년 헝가리 국립극장에서 선보인 '더 헌팅 신스 프롬 로워 바바리아(The Hunting Scenes from Lower Bavaria)'의 공연 풍경이다. 독일 극작가 겸 배우 마르틴 슈페르(1944~2002)의 작품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선보였다. 특히 '갈매기', '베니스의 상인', '줄리어스 시저' 등 고전의 현대적 해석에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연출이 돋보인다.

영국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400주기를 맞아 국립극단이 올리는 셰익스피어의 후기 로맨스극 '겨울이야기'의 연출을 알폴디가 맡아서 눈길을 끈다.

알폴디는 5일 파격적인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극단적으로 연출을 하겠다고 시작하는 건 아니다"면서 "연출을 할 때마다 실체적이고 현대적으로 고집하고 분석하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극단적으로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라며 웃었다. "이제 나이가 들었다. 예전에는 훨씬 극단적이었다. 하하. 예전에는 사고나 혼란을 많이 일으키려고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잘 연출하는 거다. 무엇이 극단적일지 혼란을 일으킬지 모른다. 이번에는 한번도 작업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 하니 (파격적인 연출에 대해) 정확히 뭐라고 이야기해야할 지 모르겠다. 관객들이 극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극단적이었으면 한다. 긍정적으로. 하하."

공연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극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를 분석할 때 극단적인 면이 나온다. 무대 위에 일어나는 것 사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그런 것이 나온다." 사람의 한자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하는 인간(人間)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겨울이야기'의 중심도 결국 사람이다. '오셀로'의 질투와 비극으로 시작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야기로 끝나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결정판으로 통한다. 1588년 영국의 인기 작가 로버트 그린의 '판도스토–시간의 승리'를 셰익스피어가 희곡으로 각색했다.

원작은 긴 시간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던 주인공 판도스토가 다시 만난 자신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죄책감으로 죽음을 맞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화해와 용서를 통해 이야기를 행복하게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쉽지 않다. 판도스토에서 모티브를 따 온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는 왕비 헤르미오네가 자신의 친구이자 이웃나라 보헤미아의 왕인 폴리세네스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한다. 질투심에 눈이 먼 레온테스는 헤르미오네를 감옥에 가두고, 그녀가 낳은 자신의 딸을 영토 바깥에 버리도록 명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르미오네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레온테스는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후회의 나날을 보낸다.

알폴디는 '겨울이야기'가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는 가장 연출하기 어려운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감정적으로 아주 깊은 아픔을 어떻게 무대 위로 올릴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이 힘들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갈등, 가정적인 갈등, 사회적인 갈등 등 모든 갈등의 출발점은 인간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질투,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갖고 싶은 마음 등 때문에 세상이 불 타오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해피엔딩이다. 16년의 세월을 건너 뛴 4막에서는 보헤미아 땅에 버려졌다가 양치기에게 발견돼 운 좋게 살아남은 레온테스의 딸 페르디타와 폴리세네스의 아들 플로리젤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분위기가 반전된다. 마지막 5막에서 죽은 줄 알았던 헤르미오네의 소생으로 작품은 절정에 이른다. "이 연극은 갈등과 잘못이 많아도 인생은 그래도 살아갈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인생은 그래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많은 사람이 죽어도, 그래도 남녀가 사랑하고 우정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거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지금까지 15~20편 가량 연출했다. 각색할 때마다 이야기를 압축시켜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셰익스피어의 나라인) 영국 극장 친구들이 편한 말로 번역하고 각색할 수 있으니까 좋겠다고 한다."

"셰익스피어가 현대에 작품을 다시 썼으면 이렇게 길게 안 썼을 거다. 작품을 압축시키려고 노력했다. 각색할 때는 이야기를 쉽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가장 중요한 건 극장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매체라는 거다. 그러니 관객들이 되도록 이야기를 잘 따라갈 수 있게 만들어야지. 하지만 중요한 대사는 하나도 생략을 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거다. 예술적인 가치를 잃어버리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셰익스피어를 아무도 모르는 400년 전으로 정형화시키고 싶지 않다는 그는 셰익스피어가 대단한 이유로 "완벽하게 재미가 있고 대중문화와 예술을 완전히 합쳤다는 점"이라고 봤다. "당시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성공시키기 위해 안 한 것이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 그것의 모습이었다. 관객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을 완벽하게 결합한 사람이다."

한국어를 쓰는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강조한 건 속도를 늦추라는 것이다. "가장 빨리 배운 말이 '천천히'다. 한국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짧으니까 빨리 이야기하는 것 같다. 헝가리어로는 8글자가 되는 것이 한국어는 한 글자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재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언어, 즉 텍스트는 연극에서 한 요소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건 배우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다. 어떤 언어로 말하는가와는 상관 없다"고 강조했다.

알폴디는 배우로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안 카라마조프 등을 연기했다. 그는 "배우의 시선으로 연출을 하지는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배우로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연출로 와 있는 거다. 연극의 온 부분을 다 살펴봐야 한다. 배우의 마음으로 다른 배우에게 나와 똑같이 해봐라고 이야기하는 건 이기적이다. 다만 배우의 경험이 바로 조언을 할 수 있을 때 도움은 된다. 또 배우가 나를 속일 수 없다는 것도 있다. 나 역시 배우할 때 연출에게 똑같은 속임수를 썼으니. (웃음)"

알폴디는 2008년 헝가리 국립극장에 최연소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주목 받았다. 5년 간 헝가리 국립극장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며, 당시 가장 인기 없던 극단을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곳으로 탈바꿈시켰다. 연간 총 14만 명의 관객 중 절반이 24세 이하의 젊은이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행보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일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며 도움을 못 받는다. 헝가리에 우파 기독교 극장 연맹, 좌파 자유주의 극장 연맹이 있는데 예술은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니다. 예술은 독립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우파나 좌파로 가는 순간,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연출은 정치가가 아니다."

진지함과 유쾌함을 자유스럽게 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는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잠을 잘 때도 편하게 잔다. 거울을 볼 때도 편하게 본다. 무엇보다 헝가리 국립극장 매표소가 열리기 전 표를 빨리 사려고 줄을 선 관객들을 보면 웃을 이유가 있다."

약 두 달 전 한국에 왔다는 알폴디는 한국 공연과 배우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똑같이 현대적인 배우들이더라. 편견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다 밝혀졌다. 작업을 똑같이 하고 있다. 고향에서 작업하는 것과 같다. 차이점이 없다"고 전했다. 다만 "유럽 배우들은 훨씬 더 자존심이 강하다. 지금 국립극단에서 같이 작업하는 배우들은 그렇지 않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고 짚었다.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미쳐 보일 수 있다. "이것은 비교적 부드러운 표현이다. 이것보다 심각하다. 하지만 배우들과 작업할 때 '당신 외계인이야?'라는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겨울이야기'도 인간과 인간 사이가 중요한 작품이라며 "환경이 역사적이면 공연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멀어질 수 있다"고 봤다.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비주얼이 오늘날 관객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연극평론가인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겨울이야기'는 우리 시대에 도달하기 힘든, 이루기 힘든 화해라는 화두를 다룬다"면서 "셰익스피어의 화해는 진정한 아픔과 성찰, 고통이라는 강력한 의례를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기만적인 화해가 아니라 진실한 직면한, 어려운 과정을 통한 화해를 통해 이 시대의 화해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는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알폴디는 "그런 부분 때문에 세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이라서 다행이다. 정말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많이 힘들어도 기회는 있다는 거지. 아무리 어이가 없는 상황이라도, 갈등이 컸어도 상대방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면 이를 용서할 수 있는 거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긍정적이기도 하다. 정말 아름답고 세상에 물려줄 유언 같은 것이다."

알폴디는 무대를 독특하게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반응이 좋았던 '햄릿'은 무대와 객석을 역전시켜 관객이 무대에서 공연을 관람하게 했다. 무대(실제 객석)를 마치 공사 중인 것처럼 꾸며서 닫힌 문화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헝가리 젊은이들의 현실을 고전에 빗대어 표현했다.

박동우 무대디자이너와 손잡는 이번 '겨울이야기' 무대 역시 눈길을 끈다. 시칠리아는 상류층이 머무는 공간으로 거울처럼 빛이 반사돼 보이는 아름다운 벽이 무대를 둘러싼다. 보헤미아는 하층민이 거주하는 어두운 지하 공간으로 설정한다. 후반부 16년 만에 헤르미오네가 기적적으로 소생하는 환상적인 순간은 물이 가득 찬 높이 2m의 수조가 깨지면서 볼거리를 안긴다.

젊은 연극 창작그룹 '양손프로젝트'의 대표 배우인 손상규가 비극의 주인공 레온테스, 국립극단 지난해 최고 화제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목을 매 자결한 단호한 공주의 모습을 보여준 우정원이 남편의 의심에도 꿋꿋하게 결백을 주장하는 왕비 헤르미오네 역을 맡았다.

10~2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폴릭세네스 박완규, 파울리나 김수진. 번역·통역 우르반 알렉산드라 에스테르, 윤색 이경후, 무대 박동우, 조명 김창기. 러닝타임 145분(휴식 15분 포함), 2만~5만원, 국립극단.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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