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디지털적이면서 아날로그적인…정승호 무대

입력 : 2015.12.17 11:26
열다섯 살 소년 '크리스토퍼'가 엄마를 찾아 런던으로 향한다. 거의 비어있다시피한 공간에서 에스컬레이터가 생겨나고, 사람으로 번잡한 기차 역사가 순식간에 기차 안 공간으로 바뀔 때 객석 곳곳에서 탄성이 터진다.

라이선스 초연 중인 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의 무대는 올해 작품들 중 수위로 꼽을 만하다. '시각 효과의 승리'로 부를 만한 장면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자폐증을 앓고 있는 크리스토퍼의 시선이 그대로 녹아들어간다.

미니멀한 건물에 빔 프로젝터를 쏘아, 다른 공간들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마치 컴퓨터 게임 같다. 수학을 좋아하는 크리스토퍼의 성향을 반영한 듯, 여러개의 빔으로 구획을 나누고 합치는 풍경 역시 인상적이다. 크리스토퍼가 얼굴 표정을 그리면, 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등 인터렉티브 미디어를 통해 그가 무대와 교감하는 듯하다.

중심에는 무대디자이너 정승호 교수(48·서울예대 연극과)가 있다. 김태형 연출과 마선영 조명디자이너, 조수현 영상디자이너에게도 마땅한 공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정 교수가 전체적인 얼개와 중심축을 든든히 잡아준 부분이 크다.

연극은 2003년 발표된 마크 헤던의 동명 소설을 각색했다. 크리스토퍼가 이웃집 개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목격한 뒤 탐정 노릇을 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성장담이다.

정 교수는 "디자인하면서 가장 중시한 건 크리스토퍼의 우주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눈을 반짝였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아는 우주도 있지만, 크리스토퍼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우주를 그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2013년 영국 초연 당시 영국의 토니상이라 불리는 '올리비에 어워드'에서 '최고 신작상' '연출상' 등 7관왕을 차지했다. 올해 6월 '제69회 토니상' 연극 부문에서 '최우수 작품상' 등 5관왕을 안았다. 특히 두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조명상과 무대상을 모두 아울렀다.

하지만, 로열티 등의 문제로 한국 라이선스는 대본만 사온 스몰 라이선스다. 정 교수와 김 연출 등 스태프들이 처음부터 무대를 만들어가야하는 셈이다.

정 교수는 그런데 앞서 이 연극을 보지 못했다. "김태형 연출도 영국에서 봤고, 마 디자이너와 조 디자이너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봤다고 하더라. 근데 이미지가 머리에 박히면 헤어나오기 어려우니까, 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이후 본 친구들에게 물어봤다. 무대가 비슷하냐 다르냐고. 많이 다르다고 해줘서, 다르면 됐다고 했다. 하하."

원 무대를 미니멀하게 꾸민 건 "무대에서 쓸데 없는 걸 빼고, 마 디자이너와 조 디자이너를 믿고 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사실적인 표현은 하지 말자고 했다. 최대한 절제하고자는 전제를 깔고 출발했지. 크리스토퍼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설명하듯이 표현하기보다는, 관객들이 시각적으로 같이 상상을 했으면 했다."

영상과 조명 등의 기술이 화려하고 뛰어나지만 자랑이 아니다. 이야기에 최적화돼 있다. 특히 결국 아날로그 감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다.

크리스토퍼가 런던으로 떠나는 여정을 축약하는 모형 기차와 레일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제조 업체인 우리나라 회사를 찾아 손수 제작했다. 영상과 조명의 화학접 결합에서 이 물리적인 힘이 솟구쳐오룰 때, 감정을 이끌어내는 움직임도 크다. 현급지급기, 전자레인지, 공기청정기, 서랍, 옷걸이 등이 물리적인 형태가 아닌, 배우들의 육체의 옷을 입고 구현될 때 디지털 세계 속은 신선해진다.

특히 극 마지막에 태어난 지 갓 두달 가량 된, 실제 골든 리트리버 '샌디'가 등장할 때가 절정이다. 디지털 기술의 향연인 이 극에서 아날로그 감성의 점정을 찍는 부분으로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정 교수는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원작 역시 아날로그적인 것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라고 눈을 반짝였다. "시대가 디지털 것으로 채워지는데 연극은 디지털적이지만, 모든 걸 디지털 적으로 채우지 않는다. 아날로그적인 중요한 것을 심어놓았다. 샌디가 대표적이지. 참 아날로그적인 작품이다."

무대도 배우이기를 바란다는 정 교수의 마음 때문인지,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의 영상과 무대는 디지털적임에도 인간적이다.

"영상과 무대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배우처럼 연기를 하듯이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영상디자인을 하면서 너무 많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지만, 더 많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지."

정 교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 중 한명이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일품이었던 '스위니 토드'를 비롯해 대형 뮤지컬의 구조를 그대로 적용한 '레베카' '모차르트!'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베르테르의 마음을 대변하듯, 수많은 해바라기가 하나씩 쓰러지는 장면으로 유명한 뮤지컬 '베르테르' 역시 그의 작품이다.

좋은 무대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무대 속에서 인간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기위해서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공학, 예술성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간이 아닌, 무대가 스토리를 진하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모든 게 시간이라는 판단이다. "배우가 여기에서 저기까지 움직여야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하듯, 무대도 똑같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해당 장면의 정서를 담고 있어야 하는 거지. 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에서 크리스토퍼가 자폐아지만, 장애 아동을 다룬다기보다는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의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장애가 아니다. 세상을 달리 보면서 용기 있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소년이지." 그 과정에 무대가 함께 있는 셈이다.

배우 겸 프로듀서인 김수로가 대학로에서 선보이고 있는 브랜드 공연 '김수로 프로젝트'의 하나다. 2016년 1월31일까지 논현로 광림아트센터 BBCH홀. 윤나무, '슈퍼주니어' 려욱, 전성우, 김영호, 심형탁, 배해선, 김지현. 아시아브릿지컨텐츠·클립서비스. 1577-3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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