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등촌동서 음악회 연 연광철]
바이로이트·베를린 휩쓴 巨匠… 80명 어르신 청중앞서 가곡 불러
귀 어두운 스승은 눈 감고 듣다 "고맙다"며 제자 어깨 두드려
15일 오후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실버타운. 이 건물 지하 1층에 자리한 소강당에서 베이스 연광철(50·서울대 교수)이 장정 세 명과 함께 업라이트 피아노를 무대 위로 들어 올렸다. "목소리가 좀 더 잘 들리는 지점을 찾으려고요." 한숨 돌리려던 그때 강당 뒤쪽에서 음향을 점검하던 지휘자 김덕기(62·서울대 교수)가 소리쳤다. "무대로 올라가니 소리가 너무 울리네. 다시 밑으로 내리는 게 좋겠어. 그래, 거기가 딱 좋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으면서도 연광철은 싱글벙글했다.
세상에서 가장 몸값 비싼 베이스 중 한 명인 연광철이 이날 100명도 안 되는 청중을 놓고 리사이틀을 열었다. 청주대 성악과 재학 시절, "성악을 제대로 가르쳐준" 바리톤 주완순(86) 전 청주대 교수를 위해 연 '사은(謝恩) 음악회'. 주 전 교수는 교직에서 물러난 후 이 실버타운에서 살고 있다.

연광철은 바그너 음악의 성지(聖地)인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탄호이저' '발퀴레' '파르지팔' 등 굵직굵직한 작품 주역을 꿰찬 '바그너 가수'. 11년간 베를린 국립오페라 전속 가수로 활약했고, 2018년까지 미국과 유럽 주요 오페라극장 주역으로 출연 일정이 꽉 차 있다. 우선 내년 6월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를 비롯해 런던 로열오페라, 빈 국립오페라, 파리오페라에 출연한다.
이렇게 바쁜 그가 전문 공연장도 아닌 실버타운 소강당에서 독창회를 연 까닭은 뭘까. "3년 전 베를린 음대 은사인 헤르베르트 브라우어를 위해 그 댁에서 공연을 가진 적이 있어요. 똑같이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는 "음악가로서 갖춰야 할 성실한 자세를 주 선생님께 다 배웠다. 빈털터리로 불가리아 유학을 갈 때 비행기 삯을 대주시고, 결혼식 주례도 서주셨다"고 했다.
스승이 기억하는 '19세 연광철'은 "싹수가 파란 욕심쟁이"였다. "가진 소리가 좋으면 나태해져서 노력을 안 하는데 얘는 그런 게 없었어요." 쉬는 날에도 수시로 찾아와 질문을 퍼부었다고 했다. "속으로 '앞으로 대성하겠다' 했는데 딱 들어맞아서 좋아요. 교육자가 딴거 있나요? 제자가 훌륭하게 되는 게 가장 큰 보람이지요."
공연 30분 전, 어르신 관객들로 준비한 80석이 꽉 찼다. A4 용지에 복사한 프로그램도 순식간에 바닥났다. "아유,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라면서요?" "그러게요, 이만치 유명하신 분은 처음이네요." "인상도 좋으셔라. 저런 제자를 둔 주 교수님은 얼마나 뿌듯하실까." 요양보호사 박병숙(63)씨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귀찮아서 잘 안 오시는 분들도 오늘은 모두 오셔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4시 정각, 공연이 시작됐다. 피아노 반주는 연광철의 음악계 선배인 김 교수가 맡았다. 첫 곡은 스승이 가장 좋아하는 홍난파의 '사공의 노래'였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 따스한 음색과 풍부한 성량, 노랫말의 내면을 꿰뚫는 깊이까지, 그가 노래를 부르자 어수선했던 실내가 차분해졌다. 귀가 어두워진 스승은 제자가 잘 보이는 앞줄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평균 나이 '80세'인 청중을 위해 "독일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같이 '어려운 건' 일부러 조금만" 넣었다. 나머지는 '옛 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그 집 앞' 등 익숙한 가곡들로 채웠다. 공연 중간, 연광철은 자신의 제자인 테너 박동순, 베이스 조주환이 노래 부를 때 스승 옆에 딱 붙어앉았다. 어르신들은 아는 가곡이 나오면 읊조리듯 따라불렀다. 윤수원(81)씨는 "음악 모르는 내 귀에도 오늘 공연은 최고였다"며 엄지를 세웠고, 직원 조하나(31)씨는 "다들 눈 감고 들으시는데 얼마나 평온해 보이던지…" 하며 감사해했다. 장일남의 '기다리는 마음'으로 앙코르까지 끝낸 제자에게 스승은 "고맙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공연 내내 긴장해 있던 연광철은 비로소 표정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