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 그의 이름을 지워보자…연극 '꽃의 비밀'

입력 : 2015.11.12 09:29
영화감독 겸 연극연출가 장진(44)은 이야기꾼으로 통한다. 웃음의 리듬을 추동력으로 삼는다.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웃음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런 상황극을 만든다. 이로 인해 감독의 예술인 영화에서는 물론, 배우의 예술인 무대에서도 '장진표' 브랜드가 생겼다.

13년 만에 대학로에서 신작 코미디 연극 '꽃의 비밀'을 선보이기 전 수현재시어터에서 만난 장진은 큼직하게 자신의 이름을 박은 '꽃의 비밀' 포스터를 보고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한다"며 웃었다. 그의 이름 옆에는 '전 국민을 웃길'이라는 수식어도 있다.

"관객이 많이 들려면 (컴퍼니에서) 저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13년 만에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고. 전 국민도 웃길 생각은 아닌데 말이지. 나도 이제 (데뷔) 20년이 됐는데 이런 말 안 쓰고 그냥 해주면 안 되나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해왔던 과거를 잊고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과거의 뭔가에 힘 입어 지금의 나보다 더 큰 포장하는 것을 다 빼고 싶다. 지금 현재의 진경이 만들어지는 그 작품만으로도 잘 됐으면 좋겠다. 대단하지도 않은 내 이름을 굳이 애써서 팔지 않아도 되는. 그냥 연극이니까, 그냥 배우니까, 그냥 이야기니까 됐으면 좋겠다. 이름이 브랜드가 되는 게 솔직히 스트레스이긴 하지. 나도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인데 잘 모르겠는데, 브랜드라니 끔직하다. 하하." 장진이 새 극본을 내놓는 것은 2002년 연극 '웰컴 투 동막골' 이후 처음이다. 그간 기존극을 다시 공연하거나 뮤지컬 '디셈버'를 공연하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는 그가 연극 '서툰 사람들' '택시 드리벌' '리턴 투 햄릿'에서 보여준 재기가 녹아들 것으로 보인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쓴 작품이라고 했다. 올해 1월 첫째주에 쓴 작품으로 공연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다. "92년, 93년도에 쓴 작품처럼 썼다. 공연을 목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거지. 당시 습작생이었는데 그때 글쓰기가 너무 즐거웠다. 매일 매일 일기 쓰는 것 같았고. 이번에 그 심정이었다."

공연을 바로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 초심은 어릴 때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갔다는 걸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했다. "밖에서 늘 하는 이야기인데, 난 글 쓸 때가 제일 좋다. 마지막에 뭘로 남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작가'로 남고 싶다고 답했다."

그의 말마따나 '꽃의 비밀'은 작가적 역량이 한껏 발휘된 작품이다. '골 때리는' 아줌마 네 명이 남편의 보험금을 타기 위해 각자의 남편으로 변장해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탈리아가 배경이다. '축구에 환장하는' 남편들이 다른 도시 축구장으로 가던 도중 교통사고가 난다. 한 남자의 아내가 자신의 남편을 죽이기 위해 브레이크를 터뜨렸기 때문이다. 남편들이 죽기 전 보험에 가입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아내들이 남편을 대신 연기하는 셈이다. 관건은 마지막 메디컬 테스트.

장진이라는 이름을 지우면, 이탈리아 번안극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국색이 없고 신선하다. 말로는 연극 무대가 고향이라고 했는데 그간 신작을 내놓지 않아 "자기 반성도 많이 했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걸쳐 한꺼번에 두 편의 희곡을 써냈다. '꽃의 비밀'을 쓰기 한 주 전인 지난해 말 마지막 주에 '얼음'을 또 썼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신기를 받은 것처럼 부리나케 썼다.

"'꽃의 비밀' 리허설을 지켜보면서 내 스스로도 저런 대사를 왜 썼지, 궁금하더라. 개인적으로 40대 중반을 통과하는 즈음인 작년에 많이 힘들었다. 작업 노선도 그렇고, 생각도 많고 힘들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큰 시장에서 해야 하는 것이 많았지. 영화, 드라마를 빨리 준비해야 하는 시기도 있었고. 이번 희곡들은 몇년동안 맴돌고 있었던 이야기를 잠깐 동안에 써내려갔다. 예전 같으면 시골 같은 곳에 가 글을 썼을 텐데 이번에는 사무실에서 며칠동안 작업한 결과물이다."

덕분에 앞서 언급한 희곡을 대하는 초심이 생긴 것이다. 김연재, 추귀정, 한예주, 김대령, 조연진, 한수연, 이창용, 오소연, 심영은, 김나연, 차재이, 권세린 등 영화와 연극을 오가는 배우들이 포진했지만, 티켓파워를 자랑하는 '매체 배우'들이 아닌, 소극장 배우들을 택한 것도 그러한 마음의 연장선상이다.

"나도 그렇고 배우들도 그렇고, 연극에 집중하고 싶었다. 내 이름을 가져다 과대 포장해서 팔지 않더라도 작품의 힘만으로 관객들을 만나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엇박자 리듬의 웃음 포인트 등 '장진식 코미디'로 유명한 그이지만, '코미디 연극'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다. "코미디 연극은 한 달 이상 공연하면 힘이 빠진다. 관객들이 쉽게 반응한다는 이유로 배우나 연출이 익숙해지는 거지. 좋은 코미디가 웃음의 횟수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100번 웃는 연극에서 20번 더 웃기는 것이 더 좋은 코미디일까? 막 웃기는 것이 좋은 작품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야기에 치중한다. 배우들에게도 불확실한 웃음 때문에 모험하지 말라고 한다. 진지하게 미친듯이 집중해서 가면 좋은 이야기가 나오고, 그런 부분이 코미디적인 상황과 이어질 때 관객들이 '좋은 코미디'를 봤다고 느낄 것이다."

'아는 여자'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 '아들' '굿모닝 프레지던트' 등 2000년대 만든 영화들이 호평 받았다. 하지만 최근 영화 '하이힐'과 '우리는 형제입니다', 지난해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과 폐막식, 2013년 김광석의 노래를 엮은 주크박스 뮤지컬 '디셈버' 등은 그의 명성에 기댄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잘 안 되면 내 재능의 한계다. 아시안게임도 그렇고 '디셈버'도 그렇고 아쉬운 소리를 하면 한도 끝도 없다. 재능의 한계가 느껴진다고 해도 다른 장르를 피해간다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순간에 충실하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한다.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 자체를 아직도 즐긴다. 예를 들어 '꽃의 비밀' 직전에 쓴 '얼음'은 남자 2명이 나오는 2인극인데 실험적인 것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자신이 예전에 인터뷰를 한 할리우드 영화감독 로버트 저메키스(64) 이야기를 꺼냈다. '백 투 더 퓨처', '포레스트 검프', '캐스트 어웨이' 등을 연출한 거장이다.

"당시 영화 '플라이트'로 인터뷰를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당신은 어디를 향해 비상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지. 근데 환갑인 거장이 자신이 65세 때 만들 영화가 궁금하다고 하더라. 그 나이가 되면 어떤 영화를 만들지 말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65세 때 인생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다며. 그 감독이 히치콕이고 그 작품은 '사이코'다. 그 말의 유효기간이 긴 지 아직도 머릿속, 가슴속에 남아 있다. 선험자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당시 이 판을 뜰 생각만 했다. 적당히 하다가 가야지라는 생각. 그 말씀을 듣고는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다. '가보자' '가보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살아가고 있는 중이니까."

이처럼 살아가는 중인 그는 여전히 아이디어로 넘친다. 다양한 영역을 살펴보고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미디어 시장인 멀티채널네트워크(MCN)를 눈여겨보고 있다. 뉴미디어 기반 국내 문화콘텐츠 회사인 '메이크어스'를 통해 모바일 전용 콘텐츠도 만들 계획이다.

'꽃의 비밀' 다음 공연에는 여장을 한 남자배우들이 남장을 연기하는 것도 구상 중이고, 이 작품을 해외로 번안해 진출하는 것도 타진하고 있다.

하지만 연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만큼은 정직하고 뚝심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고,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본의 아니게 (연극 판에서 내 뒤에) 오는 분들을 뭔가를 해야 하는 순간이 됐더라. 작품 자체는 의미가 있는데 마케팅 등의 전략 부재로 관객들을 못 만나는 작품 말이다. 만약 '꽃의 비밀'이 긍정적인 결과, 즉 나쁘지 않은 (관객) 숫자를 얻으면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장진의 이름만을 팔아서 두 달을 버틸 수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작품의 힘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꽃의 비밀'에는 스페셜리스트, 즉 매체 배우가 없다. 그런데 정말 좋은 작품이면, 관객이 온다. 어릴 때부터 믿었던 거고, 그렇게 공부했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걸 믿고 있다. 그게 현재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왜 부정을 하느냐는 거지. 작품이 좋으면 쫄지 말고 작품의 힘으로 가보자라고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장진이 이끄는 문화창작집단 수다가 배우 조재현의 수현재컴퍼니가 처음 손잡고 선보이는 연극이다. 12월1일부터 2016년 1월31일까지 대학로 DCF 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 러닝타임 100분(인터미션 없음), 4만~5만원. 수현재컴퍼니. 02-766-6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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