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9.18 10:23
로베르 르파주 '치유로서의 미장센'의 정점
캐나다 출신의 천재적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68·로베르 르빠주)의 대표 연출작 '바늘과 아편'은 관객을 무아지경으로 몰고간다.
공중에 매달려 계속 돌고있는 대형 정육면체는 뉴욕의 거리, 파리의 호텔 등 끊임없이 바뀌는 시공간을 보여준다.
엄밀히 말하면 정육면체의 반을 잘라냈다. 관객은 이에 따라 3면을 볼 수 있는데 영상을 그곳에 쏴 다양한 입체감을 부여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실과 몽환적 세계의 이중주를 보여주는 영상은 미니멀리즘(절제된 형태를 추구하는 미학)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형식이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이 놀랍다. 프랑스 영화감독 겸 극작가인 장 콕토의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짧은 책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콕토, 미국의 거장 재즈 트럼피터 마일스 데이비스, 캐나다 출신의 배우 로베르 등 사랑을 잃은 세 남자가 중독된 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에 중독돼가는 아이러니를 그린다.
상실, 불안, 고독 등의 정서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다. 르파주 미장센의 무기인 영상과 무대 기술은 이 정서를 정확히 떠받친다. 눈을 현혹하는 게 아니라 무대에 흐르는 감정을 풍성하게 만든다.
'상상력이 꿈의 결과물이라고 단정짓지 말라'고 말하는 콕토는 미국에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프랑스로 돌아온다. 데이비스는 피부색에 상관 없이 실력을 인정받고 사랑하는 여인 줄리엣 그레코를 만난다. 로베르는 미국과 프랑스 합작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프랑스에 머물고 있다.
세 사람의 삶이 교차하는 무대를 관통하는 건 재즈다. 데이비스는 루이 말 감독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보고 악보도 없이 트럼펫으로 재즈를 즉석 연주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 속엔 르파주의 자전적인 이야기도 녹아들어갔다. 그가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퀘벡 출신이기 때문이다. 퀘백은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 커 다원적인 예술이 싹튼 곳이고 르파주 같은 독특한 심미안을 지닌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했다.
지난해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적인 국제 공연예술마켓인 '제16회 시나르(CINARS)'에선 르파주에게 헌정하는 시리즈가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개막식에 등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르파주에게 공연은 치유이기도 하다. '바늘과 아편'에서도 마약을 등장시켜 "(물리적)치료보다 (정서적)치유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극 중 로베르는 "콕토와 데이비스는 고통을 승화시켜 아름다움을 만들었다"고 감탄한다.
르파주 역시 마찬가지다. 무대가 바뀔 때마다 인물들은 우주를 유영하듯 무대의 벽을 넘나들고 문을 여닫는데 정육면체는 결국 우주 속 지구인 셈이다. 한 무대 위에 우주와 지구, 사랑과 인생을 모두 담은 르파주의 솜씨는 아름답다. 르파주의 작품은 장르를 구분지을 수 없다. 르파주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다.
1991년 초연했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유명 배우이자 이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은 마크 라브래시의 권유로 르파주가 20여 년 만에 리바이벌했다. 19일까지 역삼동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르는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장 콕토·로베르 역 마르끄 라브레쉬, 마일즈 데이비스 역 웨슬리 로버트슨 3세. 러닝타임 1시간 35분(휴식 없음). 4만~8만원. LG아트센터 02-2005-0114
눈은 황홀경·마음은 무아지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