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료도 내놓을 것"… 사실상 '無보수 지휘' 밝혀

입력 : 2015.08.28 03:00   |   수정 : 2015.08.28 06:36

[정명훈 "가만히 있었더니 일이 엉뚱하게 돌아가"… 그간 논란에 대해 작심 발언]

-"내게는 음악이 중요할 뿐"
"감독 자리엔 관심 없어"
-11월 평양 공연에 대해
"독일 명문 악단과 방문… 말러 교향곡 4번 연주하고 앙코르로 '아리랑' 생각 중"

-'고액 연봉' 논란에 대해
"프랑스나 中·日에서 비슷한 수준의 지휘료 받아
40년前 연주료 50弗 받으며 단계 단계 지금까지 왔다… 그간 성과 보지 않고 비판"

-항공료 횡령 의혹에 대해
"이번 일 때문에 알아보니 市響 연주로 쓴 항공료 1억 청구하지도 않았다더라…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나"

"서울시향 예술감독직(職)을 내려놓겠다. 그러나 서울시향과 청중에게 약속한 공연 지휘는 계속 맡겠다. 지휘료는 한 푼도 나를 위해 쓰지 않고, 시향의 발전이나 유니세프 같은 인도적 사업을 위해 내놓겠다."

“지휘료는 한 푼도 나를 위해 쓰지 않고, 서울시향 발전을 위해 내놓겠다.”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은 27일 작심한 듯 말을 쏟아냈다. 그는“예술감독 자리도 내놓고,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했다. /이덕훈 기자
“지휘료는 한 푼도 나를 위해 쓰지 않고, 서울시향 발전을 위해 내놓겠다.”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은 27일 작심한 듯 말을 쏟아냈다. 그는“예술감독 자리도 내놓고,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했다. /이덕훈 기자
27일 낮 만난 정명훈(62) 서울시향 예술감독은 올 연말 계약 기간이 끝나는 서울시향 예술감독직에 대해 "재계약 서류에 사인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서울시와 서울시향은 당초 다음 주쯤 정 감독과 재계약을 마무리 지을 예정이었다. 정 감독이 예술감독 자리를 내놓고 사실상 '무보수'로 지휘하겠다고 밝히면서 작년 12월부터 불거진 '서울시향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지난 1월 기자회견 이후 정 감독은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와의 갈등, 고액 연봉 논란, 항공료 횡령 의혹이 쏟아져 나와도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이날은 작심한 듯했다. 그는 "가만히 있었더니, 엉뚱하게 일이 돌아갔다"고 했다.

―예술감독 자리를 내놓으면, 서울시향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감독 자리에 미련이 많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데, 내게는 음악이 중요할 뿐 원래 이런 책임 있는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년 서울시향 프로그램이 거의 확정됐는데, 시향 및 청중과 약속한 공연 지휘는 계속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예술감독으로서의 급여도 받지 않고, 지휘료도 시향 단원들의 복리 증진이나 인도적 사업에 쓰겠다."

그는 "예술감독 재계약 서류에 사인하는 순간 이런저런 시비가 이어질 것 같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와 어떻게 갈등을 빚었나.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서울시향 직원들의 인권(人權) 문제다. 한두 명도 아니고 17명이나 대표로부터 인간적 모욕을 당했다고 호소하며 도와달라고 하는데, 예술감독으로서 어떻게 가만 있나. 예전에 제네바에서 오페라 지휘할 때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전부 있는 자리에서 극장 대표가 부하 직원을 함부로 대해서 '이렇게 하면, 다시는 지휘하지 않겠다'고 한 적 있다. 결국 그곳에 다시 가지 않았다. 그래서 박원순 시장도 만나 얘기했는데, 박 전 대표는 내가 단원들을 부추겨서 자기를 나가게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서울시향 직원 17명은 작년말 박 전 대표가 폭언과 욕설, 성희롱을 했다며 고소장을 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수사한 종로경찰서는 지난 12일 박 전 대표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불기소 의견을 냈다.

―타지도 않은 항공료를 청구했다거나, 서울시향과 관련 없는 항공료를 받아갔다고 해서 논란이 됐다.

"이번 사태 덕분에 어려운 단어 하나를 배웠다. 나보고 '횡령'했다고 하는데…. 하나만 얘기하겠다. 이번 일 때문에 알아보니, 서울시향 연주 때문에 내가 쓴 항공료 6건, 도합 1억원 정도를 청구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정명훈 감독은 지난달까지 예술감독으로 있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단원들을 '내 천사들'(My Angels)이라고 말하곤 했다. 서울시향 단원들에 대해선 '내 자식들'(My children)이라고 불렀다. 부모 같은 심정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로 키워보려고 노력했다. 예술감독 취임 10년이 지난 지금, 서울시향은 아시아 최고라는 일본 NHK 심포니보다 나을 만큼 성장했다."

―서울시향이 정말 NHK 심포니보다 나은가.

"NHK 심포니는 실력이 탄탄하다. 걷기는 잘 걷고, 달리기까지 잘한다. 하지만 날지는 못한다. 서울시향은 좀 부족하지만, 날 때는 난다. 말러 교향곡이나 차이콥스키 교향곡은 우리가 더 낫다."

정 감독은 세계적 음반사 '도이체 그라모폰'과 5년간 10장의 음반 출시 계약을 맺은 것은 아시아에선 서울시향밖에 없다고 했다. 최근 출간된 서울시향의 말러 9번 교향곡 음반은 영국 음악 전문지 'BBC 뮤직 매거진'의 '이달의 음반'에 선정됐다. 작년 말 나온 서울시향 상주 작곡가 진은숙의 협주곡 음반도 세계적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이 고른 '현대음악' 부문 최종 후보 셋에 올라 있다.

―이달 초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플라시도 도밍고가 주연으로 나선 베르디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했다.

"중국은 한창 클래식에 투자하고 있다. 도밍고나 나 같은 지휘자를 부르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 끄떡하지 않는다. 펑황 미디어라는 곳에서 나에게 '어떻게 하면 세계적 오케스트라를 만들 수 있느냐'며 제안해왔다. 연주회는 방송 콘텐츠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들여서 정상급 연주자들을 데려올 수 있다고 했다."

―서울시향에 대한 서울시 지원은 점점 줄고 있다.

"올해가 서울시향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지 10주년이다. 지난 10년간 서울시향은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을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축하받을 일이다. 그런데 시향에 대한 지원은 3년 전 130억원에서 20억원 넘게 줄었다. 아시안게임이 아니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려면 지금보다 몇 배 더 지원과 노력이 필요한데 아쉽다."

그는 "시향에 대한 지원만 충분하다면, 10년이 아니라 5년 내에 런던 심포니 같은 세계적 교향악단이 되는 것이 꿈만은 아니다"고 했다.

―오는 11월 독일 명문 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 평양을 방문해서 연주한다고 했다.

"드레스덴에선 평양 공연을 기정사실화할 만큼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평양은 지금까지 두 번 방문했지만, 리허설만 했고 연주는 처음이다. 레퍼토리는 그달 서울 공연과 같은 말러 교향곡 4번이다. 앙코르로 최성환의 '아리랑'을 할까 생각 중이다."

인터뷰는 점심식사까지 겸해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정명훈 감독은 "서울시향에 대해선 무한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단원 공개 평가를 통해 매년 5%씩 탈락시키는 오디션 제도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서울시향이 새로 출범할 때는 필요했지만, 3년 전부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단원들의 신분이 어느 정도 안정돼야 하는데, 끊임없이 단원을 교체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그런데 서울시가 요구한 규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대해선 답답해했다. "40년 전, 연주료 50달러를 받으면서 단계 단계 지금까지 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일본이나 중국에서 모두 비슷한 수준의 지휘료를 받는다. 내 매니저는 '왜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느냐. 더 좋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가 많은데'라며 불만이다. 그간 이룬 성과는 보지 않고 고액 연봉이라면서 험담만 하니 예술가로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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