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畵商서 시작된 '시장'… 현대미술의 메카로 성장하다

입력 : 2015.07.08 23:42

[문화 혁신의 기원을 가다]
[크리에이티브 로드] [2] 예술의 聖地, 스위스 바젤

스위스 거물 畵商 바이엘러, 1970년에 '아트 바젤' 창설
33개국 284개 화랑 참여하는 세계 최대 아트 페어로 키워

20만 도시에 미술관만 27개
렌초 피아노·프랑크 게리 등 건축가 작품도 도심 곳곳에

바젤(스위스)=허윤희 기자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스위스 바젤의 고서점에서 24세 청년이 견습생으로 일하고 있었다. 작지만 탄탄한 서점이었다. 주인 노인은 영민한 청년을 눈여겨보고 역사와 문학, 철학 등을 가르쳤다. 그해 노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청년은 은행 빚 6000프랑을 얻어 서점을 인수했다. 그는 빚을 갚으려고 팔리는 책 위주로 서점을 재단장했고 1951년에 미술 전문 갤러리로 바꿨다. 스위스의 거물 화상(畵商) 에른스트 바이엘러(Beyeler·1921~2010)다.

바이엘러는 명작을 알아보는 안목, 전시 기획자의 감각, 컬렉터를 설득하는 비즈니스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아트딜러로 성장해 갔다. 무엇보다 그에겐 바젤을 현대미술의 메카로 키우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는 1970년 아내 힐디(Hildy·1922~2008) 등과 함께 아트 페어(미술 시장)를 창설했다. 오늘날 세계 최대 아트 페어로 성장한 '아트 바젤(Art Basel)'의 첫 페이지가 이렇게 시작됐다.

바젤, 세계 미술시장을 바꾸다

제46회 아트 바젤이 열린 지난달 15~19일, 도심 메세플라츠 전시관은 미술계 '상위 1% 사교 클럽'을 방불케 했다. 전 세계에서 날아온 큰손 컬렉터들에 의해 '밀리언' 달러 단위 미술품들이 무섭게 팔려나갔다. 1회 때 10개국 90개 화랑으로 시작한 이 페어는 올해 33개국 284개 화랑이 참여할 정도로 덩치가 커졌다.

아트 바젤은 세계 미술시장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단순히 미술품을 거래하는 시장이 아니다. 1973년부터는 특정 국가를 지정해 특별전을 열기 시작했다. 첫 번째 특별전은 '잭슨 폴록 이후의 미국 미술'. 1989년에는 사진 발명 150주년을 기념해 사진 특별전을 열어 다양한 매체의 발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언리미티드' 전시는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현대 매체를 다루는 실험 미술을 집중 소개한다.

스위스 바젤 메세플라츠의‘2015 아트 바젤’전시관 입구는 행사 기간 내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매년 6월이면 전 세계 최고 컬렉터와 큐레이터, 미술관 관계자들이 바젤로 집결한다. /아트 바젤 제공
스위스 바젤 메세플라츠의‘2015 아트 바젤’전시관 입구는 행사 기간 내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매년 6월이면 전 세계 최고 컬렉터와 큐레이터, 미술관 관계자들이 바젤로 집결한다. /아트 바젤 제공
매년 6월, 전 세계 최고 컬렉터와 갤러리스트, 큐레이터들이 바젤로 집결한다. 성공 비결은 '확실한 물 관리'와 '계급화'. 양질의 아트 페어를 위해 주최 측은 매년 엄격한 기준에 따라 참여 화랑을 선별한다. 이곳은 적나라한 자본주의 공간이다. 아트 바젤 공식 행사 기간은 18~21일이었지만 고가(高價) 작품은 거의 VIP 프리뷰 기간인 16~17일 팔렸다. 이틀간의 프리뷰도 등급화돼 있었다. 프리뷰 첫날 오전엔 최상급 VIP인 '퍼스트 초이스' 카드 소지자만 입장이 가능했다.

뮤지엄 시티의 문화 인프라

하지만 아트 바젤을 세계 최대 페어로 키운 것이 단순히 돈의 힘만은 아니다. 거대 미술시장을 지탱해주고 받쳐주는 바젤의 문화 인프라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바젤은 스위스 도시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뮤지엄 시티'다.

바젤에는 유럽 최초의 공공미술관이 있다. 1662년 바젤시가 아머바흐 가문의 소장 미술품 5000여점을 구입해 세운 바젤 미술관(Kunstmuseum Basel)이다. 1967년 이 미술관에 피카소 작품을 무상으로 빌려줬던 컬렉터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이 작품 2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즉각 바젤 시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어린 학생들까지 후원금 모금에 동참했다. 결국 작품은 미술관에 남았고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감동해 작품 4점을 추가 기증했다.

(왼쪽 위부터)스위스 작가 이브 쉐러의 야외 설치 작품‘인어 공주’,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 외관, (오른쪽)뮌스터 대성당 앞에 설치된 우고 론디오네의 조각 작품. /아트바젤 제공·허윤희 기자
(왼쪽 위부터)스위스 작가 이브 쉐러의 야외 설치 작품‘인어 공주’,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 외관, (오른쪽)뮌스터 대성당 앞에 설치된 우고 론디오네의 조각 작품. /아트바젤 제공·허윤희 기자
인구 20만명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에 미술관이 27개나 있다. 세계적 건축가인 헤르조그 드 뮤론, 렌초 피아노, 안도 다다오, 프랑크 게리, 피터 줌토르 등의 작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건축의 도시이기도 하다. 에른스트 바이엘러가 만든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을 비롯해 바젤시립미술관, 샤울라거 미술관, 가구 디자인으로 유명한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이 자동차로 20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다. 건축과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성지'로 받드는 이유다.

가장 비싼 고갱 그림도 특별전에

아트 바젤이 열리는 일주일은 이 예술 성지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최적의 기간. 미술관들은 아트 페어를 보러 온 세계 관람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알찬 기획전을 내놓는다. 지난달 19일 페어장에서 트램을 타고 20분 걸려 도착한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에선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과 유럽 현대 회화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마를렌 뒤마(62) 특별전이 한창이었다. 지난 2월 3억달러(약 3272억원)에 팔려 미술품 거래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고갱의 회화 '언제 결혼하니?'를 볼 수 있었다. 타히티 원주민 여인 2명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50년 가까이 바젤 미술관에 대여 중이다.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에서 열리는 '메이킹 아프리카' 특별전에도 관람객 발길이 이어졌다. 스위스 건축가 헤르조그 드 뮤론이 설계한 샤울라거 미술관에서는 에마누엘 호프만 재단의 방대한 컬렉션을 내놓은 특별전이 내년 1월 31일까지 열린다. 안드레아 블래틀러 큐레이터는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은 아트 바젤에 들렀다가 도시 곳곳의 미술관을 순회하면서 '전시 쇼핑'을 한다"며 "미술품 공공 컬렉션의 역사에 최신 미술 흐름을 즉각 반영하는 거대 미술시장이 예술 도시 바젤을 지탱하는 저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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