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그녀의 발레, 힙합을 입다

입력 : 2015.05.18 23:27

[세계 초연 '볼레로'로 대관령 무대 찾아오는 발레리나 서희 인터뷰]

올여름 대관령국제음악제서 관능적 여성의 발레 선보여… 기존 클래식 '볼레로'와 달라
ABT 이번 봄 시즌 공연서 8개 공연 중 7개 주역 꿰차

"아! 저런…."

지난 11일(현지 시각) 저녁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75주년 기념 첫 공연인 '레 실피드(Les Sylphides·공기의 정령)'에서 남성 파트너와 파드되(2인무)를 추던 발레리나 서희(29)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객석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 다시 일어나 공기를 우아하게 가르는 팔 동작과 점프로 시인(詩人)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의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관객들은 그녀에게 '브라바'와 기립 박수를 쏟아냈다.

이틀 뒤 ABT 사무실에서 만난 서희는 "넘어진 것 봤느냐"며 쑥스럽게 웃었다. "앉았다 일어서다가 치마를 밟았나 봐요. 바닥에 옷자락이 찢어진 채 떨어져 있었어요. 그런 일도 있는 거지요, 뭐." 서희는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16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7월 4일까지 이어지는 ABT 봄 시즌에서 '지젤' '신데렐라' '백조의 호수' 등 정기 공연 8개 중 '오셀로' 한 작품만 뺀 7개 공연의 주역을 독차지할 만큼 간판 무용수로 자리 잡았다.

(왼쪽 사진)2014년‘로미오와 줄리엣’갈라 공연을 위해 서울을 찾았던 서희. 지난주 뉴욕서 만난 서희는“모든 걸 나만 가지면 재미없다. 어린 친구들한테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싶다. 그게 서른 되기 전 내 꿈”이라고 말했다. (오른쪽 사진)지난 11일(현지 시각)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단막 발레‘레 실피드’의 주역으로 남성 파트너 토마스 포스터와 2인무를 추고 있는 서희. /성형주 기자·Gene Schiavone
(왼쪽 사진)2014년‘로미오와 줄리엣’갈라 공연을 위해 서울을 찾았던 서희. 지난주 뉴욕서 만난 서희는“모든 걸 나만 가지면 재미없다. 어린 친구들한테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싶다. 그게 서른 되기 전 내 꿈”이라고 말했다. (오른쪽 사진)지난 11일(현지 시각)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단막 발레‘레 실피드’의 주역으로 남성 파트너 토마스 포스터와 2인무를 추고 있는 서희. /성형주 기자·Gene Schiavone
서희가 올여름 발레 '볼레로(Bolero)'를 들고 2015 대관령국제음악제(7월 23일~8월 2일)를 찾는다. 라벨이 작곡한 볼레로는 두 개의 멜로디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다가 점차 강해지면서 마지막엔 모든 악기가 터질 듯 힘차게 휘몰아치는 오케스트라 작품이다. 1928년 러시아 무용수 니진스키가 안무한 발레와 함께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돼 큰 성공을 거뒀다. "1년 반 전 음악제의 구삼열 대표님이 '프랑스 스타일'을 주제로 새 발레 볼레로를 하나 만들어보자고 제안하셨어요. 모리스 베자르가 만든 발레 볼레로를 좋아했는데 예전에 춤춰본 적도 없어서 '할게요' 했지요."

서희의 볼레로는 이전의 다른 볼레로들과 질감이 다르다. 클래식이 아닌 모던 발레이고, 힙합을 살짝 보탰다. 안무가 그레고리 돌바시안과 파트너 알렉산드르 해머디도 그녀가 골랐다. "저는 힙합이 가미된 모던 댄스를 춰본 적 없고, 안무가는 정통 클래식 음악을 다뤄본 적 없으니 둘이 손잡으면 진짜 쿨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았어요. 지금까지 30% 진행했는데 말이 잘 통해요. 관능적인 여성의 모습을 갈수록 크게 드러내고 싶다, 의상은 심플하되 몸이 많이 드러나고, 배경은 단순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안무가가 바로 무용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어요."

스물아홉 살, 발레와 산 지 17년째다. "전엔 시즌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했어요. 빨래도 청소도 남한테 맡기고 공연만 준비했어요.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는데 오버한 거지요." 이젠 집에 가서 쓰레기를 비우고 설거지도 한다. 공연이 삶의 일부가 된 거다.

서희는 "올해 나답지 않게 일을 많이 벌였다"고 했다. 볼레로가 끝나면 뉴욕으로 돌아가 발레단의 또래 무용수 5명과 만든 프로젝트 그룹 '인텐시오'로 모던 발레를 선보일 예정이다. 해외에서 이름난 발레 콩쿠르를 한국에 유치해 내년쯤 서울에서 열 계획도 갖고 있다.

"제가 갖고 있는 네트워크로 어린 무용수들이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은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지금 추진 중인 콩쿠르는 장학금 혜택이 있어서 다른 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니까 꼭 발레가 아니어도 좋은 걸 많이 보고 자랄 수 있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요?"

서희는 "입단 초기엔 칵테일을 마시며 부유한 사람들한테 돈 달라는 얘길 해야 하는 후원회 모임이 싫었다.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후원자들은 금융·부동산·미술 등 다른 분야에서 성공한 분들이에요. 그들과 요즘 미술계에선 어떤 그림이 유행하는지, 패션계에선 어떤 사람이 뜨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세상 이치가 트이는 느낌이에요. 내가 사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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