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꿰뚫은 고전의 모더니티…연극 '리어왕'

입력 : 2015.04.20 13:34
네 줄에 매달린 무대는 공중에 떠올라 크게 흔들렸다. 폭우와 거센 바람에 나무까지 뿌리째 뽑혔는데 광기에 휩싸인 리어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세 딸 중 두 딸에게 배신 당한 리어왕이 미친 듯 황야에서 방황하며 진실과 대면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펄떡거리는 무대와 함께 생명력을 얻었다.

무대미술가 이태섭(용인대 연극과 교수)의 무대는 일종의 제의를 위한 공간이다. 영국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4대 비극 중 가장 심오한 '리어왕' 속 캐릭터들의 위령제를 올리기 위한 곳이다.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듯 폭이 약 8m의 경사진 메인 무대가 있고 그 주변을 상하 이동이 가능한 곁가지 무대가 따른다. 메인 무대는 성문처럼 들어져 올렸다 내려지고, 위태로워 보이는 곁무대는 인물들의 유랑을 표현한다.

비극으로 치닫는 캐릭터들의 전쟁터로 안성맞춤이다. 다른 무대 장치나 소품은 없다. 캐릭터에 몰입된 배우들의 에너지만으로 무대 위 수은주는 이미 치솟는다.

연습 당시 꿈속에서도 대사를 외웠다는 리어왕 역의 장두이(서울예대 교수)는 (앞서 기자간담회에서 '리어왕'에 비유한) 히말라야 산맥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어느 상황에서도 뭉개지지 않는 그의 발성과 발음은 리어왕의 심리 상태를 적확하게 짚어내며 극의 중심축을 붙잡는다.

장두이를 중심으로 한 출연진들은 스페인의 축구 리그 '프리메라리가' 최고 팀 'FC 바르셀로나'처럼 내내 달린다. 화려한 스타 플레이어들로 '패싱 게임'을 하는 FC바르셀로나처럼 면면이 화려한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연기를 자유자재로 주고 받는다. 자신을 내친 리어왕을 끝까지 보좌하는 켄트 백작 역의 이동준은 충성스럽다. 아버지 리어왕을 배신해 그를 광기로 몰아넣은 첫째·둘째 딸 '거너린'·'리건' 역의 서주희·이명숙은 탐욕스러워 연민이 갈 정도다. 숏 커트 머리 스타일이 단단함을 표상하는 막내 딸 코딜리어 역의 서은경은 믿음직스럽다.

둘째 아들 '에드먼드'의 농간에 빠져 죄 없는 첫째 아들 '에드거'를 의심하다 두 눈을 잃고 후회하며 회개하는 글로스터 백작은 인간미가 넘친다. 미친 거지 역까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에드거 역의 이갑선은 의젓하고, 욕망의 화신인 에드먼드 역 오동식은 내내 불같이 이글거린다. 교활한 거너닌의 정직한 남편 얼바니 공작 역의 이윤재는 꿋꿋하다.

내내 리어왕을 조롱하거나 연민하던 광대 역의 이기돈은 딱 한번 정색한다. "사제들이 행동보다 말이 앞설 때, 술장수가 누룩에 물을 섞어 빚을 때 (…) 사채업자가 거리에서 돈을 셀 때, 포주와 창녀들이 교회를 세울 때, 그때가 되면 이 세상에 혼란이 올 거야." 그의 예언은 이 시대에 맥이 닿는다.

훌륭한 배우들이 읊는 셰익스피어의 한국어 대사는 시적이다. 윤광진(용인대 연극학 교수)의 번역·연출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모든 것을 해냈다. 일부러 튀지 않고 '리어왕'을 파고 들다 보니, 오히려 그 속에 있는 '현대적인 요소'를 꺼내는데 성공했다.

17일 공연에는 윤 연출의 제자인 용인대 학생, 장두이의 제자인 서울예대 학생 등 젊은 관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대다수 연극이 끝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나왔다.

리어왕의 숨이 끊어진 뒤 얼바니 공작은 마지막 장면에서 말한다. "이 비통한 시대의 슬픔에 우리들은 복종해야만 하오. 해야 할 말은 삼가고, 느끼는 것만을 말하기로 합시다. 가장 나이 많은 분께서 가장 큰 슬픔을 겪으셨소. 우리 같은 젊은이들은 그토록 많은 고난은 견딜 수도 없거니와 그토록 오래 살지도 못할 것이외다." 고전은 이처럼 시대를 꿰뚫는다. 인터미션 15분 포함 러닝타임 170분이 훌쩍 지나간다.

5월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윤색 고연옥, 조명디자인 김창기, 의상디자인 김상희. 2만~5만원. 국립극단. 1644-2003

시대를 꿰뚫은 고전의 모더니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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