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이해랑 연극상] "무대 기술, 발전할 수 있어도 '체취' 흉내 낼 순 없어"

입력 : 2015.04.09 03:00   |   수정 : 2015.04.09 03:41

[특별상 - 무대미술가 이병복]

'피의 결혼' '왕자 호동' '햄릿'… 삼베·안동포·모시·짚 등으로
한국적인 정서와 魂 살려… 극장 '까페 떼아뜨르' 세우기도

"아이고, 염치없어라, 젊은 사람이 받아야지 이 무슨….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서울 장충동 작업실에서 만난 원로 무대미술가 이병복(89·대한민국예술원 회원)씨가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한국 연극사에서 무대미술은 '이병복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병복으로 인해 비로소 무대미술과 의상의 존재가 확연히 드러나게 됐던 것이다. 수십년 동안 극단 '자유'의 공동대표를 지내며 100여편을 제작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장충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병복은 “해외에 나갈 때마다 ‘너희가 흉내 못 내는 우리만의 무대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장충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병복은 “해외에 나갈 때마다 ‘너희가 흉내 못 내는 우리만의 무대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저 각설이가 또 헐레벌떡 오는구나!"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였던 시인 정지용은 매일 명륜동부터 아현동 고개를 넘어 걸어서 등교하던 이병복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그때 이병복은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고, 1948년 박노경이 주도한 극단 여인소극장의 창단과 함께 단원이 됐다. 할머니가 "점잖은 양반집에서 광대가 웬 말이냐"며 절식할 정도로 주변의 충격은 컸다.

6·25전쟁 중 부산에서 만난 화가 권옥연(1923~2011)과 결혼했고, 1957년부터 4년 동안 프랑스 생활을 했다. "그림쟁이 남편하고 살다 보니 덜컥 불란서 유학을 간 거지. 아카데미 드페에서 조각 공부를 했어요." 1966년 연출가 김정옥씨와 극단 자유를 창단했고, 1969년에는 연극계의 전설이 된 다방형 극장 '까페 떼아뜨르'를 명동에 세웠다.

그런 세월 동안 "이것저것 연극 뒷일을 하다가" 무대미술과 의상을 본격적으로 맡게 됐다. 해외 연극이 절대 흉내 내지 못할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를 살렸다. 삼베, 안동포, 모시, 짚과 흙이 중요한 소재였다. "한지와 한국 비단에는 혼(魂)이 있어요. 질기고 푸석거리는 소리가 나고, 풀 먹이는 정도에 따라 다 달라져요."

옷이나 소품을 팽개치는 배우에겐 "대사는 없지만 얘들도 배우야!"라며 호통을 쳤다. 그의 대표작 '피의 결혼' '왕자 호동' '햄릿'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에서 무대는 '예술'로 거듭났다. 해외 전문가들이 "훌렁거리는 천 쪼가리 몇 장 가지고 어떻게 저런 감흥을 만들 수 있는 거냐"며 경악했다.

평생 옷, 인형, 가면, 장치를 만지고 보듬고 챙기면서 살다 보니 지문(指紋)이 거의 사라지는 지경이 됐다. 2006년 '이병복, 없다' 전시를 한 뒤 보관할 곳 없는 무대미술품 수백 점을 태워 버렸다. 남은 작품은 사재를 털어 지은 경기도 금곡의 한옥 박물관 '무의자박물관'으로 옮겼다. 그는 "무대 기술은 발전할 수 있지만 체취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라며 "그 체취란 것은 온몸으로 달려들어야 비로소 생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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