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男女, 세계의 귀 사로잡다

입력 : 2015.01.30 00:31

[유럽오페라 휩쓰는 한국]

-테너 강요셉
도이체 국립오페라단 발판 '라보엠' '리골레토' 주역으로
"고음 목말랐는데 한풀이해… 메트로폴리탄 무대도 설것"

-소프라노 임세경
'코지판투테' '아이다' 주역… 조수미 이어 메이저리그 진출
"내년 시즌에도 '나비부인' 베르디 주역 따내고 싶어"

빈 국립오페라와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는 오페라계의 메이저리그다. 이런 세계 최고의 오페라단 두 곳에 지난주부터 3주간 한국 성악가 5명이 번갈아가며 매일같이 주역으로 서고 있다.

테너 이용훈(42)·김재형(42)·김우경(38)·강요셉(37)과 소프라노 임세경(40)이 그 주인공이다. 김재형과 임세경이 빈 국립오페라에서 각각 '시몬 보카네그라'와 '나비부인' 주역을 맡았고,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에선 이용훈이 '일 트로바트레', 강요셉이 '윌리엄 텔', 김우경이 '라 보엠' 주역을 맡았다. 세계 최고 드림팀의 선발투수를 한국 성악가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 25일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윌리엄 텔' 마지막 공연을 마친 강요셉과 26일 빈 국립오페라 '나비부인' 데뷔 무대를 치른 임세경을 만났다.


[뮌헨 '윌리엄 텔' 강요셉] 最高音 '하이 C'만 22번… 맑은 목소리로 압도

공연 직후 분장을 지우고 만난 강요셉. /김기철 기자
테너 강요셉(37)이 4막 첫 부분에서 소총을 들고 주민들에게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아리아 '내 선조들의 집이여'를 '하이 C'로 마무리하자 '브라보' 환호가 터져 나왔다. 지난 25일 밤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열린 로시니 오페라 '윌리엄 텔'. 오스트리아 압제 아래 고통을 겪는 스위스인들의 저항을 다룬 이 오페라는 어렵기로 소문난 테너 아르놀트 역을 부를 성악가가 드물어 잘 공연되지 않는다. 테너가 내는 가장 높은 음(音)인 '하이 C'가 무려 28번(뮌헨 공연은 22번)이나 나오기 때문이다. '하이 C의 제왕' 파바로티도 공연은 하지 않고 스튜디오 녹음만 남겼을 정도다.

"하이 C가 부담스럽지 않으냐고요?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늘 고음(高音)에 목말라 있었는데 이번에 한풀이한 셈입니다." 테너 강요셉은 최근 몇 년 새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무섭게 떠오르는 '보석'이다. 전속 단원으로 있던 베를린 도이체 국립오페라를 발판 삼아 빈과 뮌헨 같은 세계 최고 오페라극장 주역으로 활약한다. '라 보엠' 로돌포,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가 요즘 많이 하는 역할이다.

"테너 고음으로 유명한 도니체티 '연대의 딸'은 아리아에만 하이 C가 집중돼 있는데, 윌리엄 텔은 중창에도 나와요. 더 까다롭지요."

현대적 연출을 많이 올리기로 유명한 뮌헨 극장이 작년 첫 공연을 가진 신작 프로덕션 '윌리엄 텔'은 4시간 20분짜리 대작. 금관 악기의 빛나는 질주 덕분에 교향악단 콘서트 첫 프로그램으로 종종 연주되는 서곡이 중간 휴식 뒤에 나왔다. 1막부터 3막 중반까지 2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윌리엄 텔이 오스트리아 총독의 지시를 어긴 죄로 아들 제미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석궁을 쏘는 장면에서 불이 꺼졌다. 30분의 중간 휴식이 지난 다음에야 서곡이 간주곡처럼 연주됐다. "4막 첫 부분이 테너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장면입니다. 그걸 위해 힘을 안배하는 게 힘들어요."

25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로시니 오페라‘윌리엄텔’의 아르놀트 역을 맡은 테너 강요셉. ‘하이C’만 22번 불러야 하는 고난도 배역이다.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Wilfried Hsl
25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로시니 오페라‘윌리엄텔’의 아르놀트 역을 맡은 테너 강요셉. ‘하이C’만 22번 불러야 하는 고난도 배역이다.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Wilfried Hsl
14세기가 역사적 배경인 '윌리엄 텔'은 요즘 얘기처럼 시공간을 바꿨다. 합창단과 가수들은 양복이나 투피스 같은 정장을 입고 나온다. 스위스 민족 영웅 윌리엄 텔은 아내에게 핸드백으로 두들겨 맞는 공처가이고, 아르놀트는 아버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철부지 아들이다. 지름 1m가 넘는 은빛 원통 수십 개가 일사불란하게 무대 위를 오르내리며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날 강요셉은 첫 등장부터 고음을 시원스레 내뻗었고, 시종 맑고 당당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뮌헨 관객들도 강요셉의 목소리에 빠져들면서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공연 후 극장 앞 맥줏집에서 만난 바이에른 오페라 합창단원 안요찬이 귀띔했다. "아르놀트를 부를 수 있는 테너는 세계에서도 몇 명 없는데 강요셉이 최고였어요. 작년 개막공연 때 부른 미국 테너보다 훨씬 잘했어요."

강요셉은 2013년 12월 빈 국립오페라극장에 세계적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와 '라 보엠'으로 깜짝 데뷔했다. 공연 4시간 전에 원래 주역이 펑크를 내면서 대타로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게오르규와 환상적 호흡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으면서 '호프만 이야기'로 다시 초청받았다.

다음 달 5일 로마 오페라극장 '리골레토' 공연의 만토바 공으로 이탈리아에서 데뷔하고, 13·14일엔 정명훈이 지휘하는 독일 드레스덴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로시니 종교음악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에도 독창자로 나선다. "밀라노 스칼라 극장으로 가기 위한 오디션 같은 겁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도 곧 서게 될 겁니다." '악바리' 강요셉은 자신만만했다.


[빈 '나비부인' 임세경] 극장 가득 울리는 성량… 幕 중간에 박수 터져

공연 다음 날인 27일 빈 국립오페라극장 앞에서 만난 임세경. /김기철 기자
"어젯밤 침대에 누워서 오페라 전체를 복기하느라 새벽까지 못 잤어요. '이 부분은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고요."

26일 밤 빈 국립오페라극장에 또 한 명의 스타 '나비부인'이 탄생했다. 이날 데뷔 무대를 치른 소프라노 임세경(40)은 두꺼운 음(音)벽을 친 오케스트라를 힘차게 뚫고 극장 뒤쪽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압도적인 성량으로 관객들을 지배했다. 미국으로 떠난 남편 핀커튼을 그리며 부르는 '어느 갠 날'은 절창(絶唱)이었다. "공연 끝난 뒤 피아니스트 반주자가 들어와 '대성공'이라고 치켜세워주더군요. 빈 관객들은 막(幕) 중간에 아리아 듣고 박수 치는 경우가 드물다고요."

임세경의 빈 국립오페라 데뷔는 홍혜경, 신영옥, 조수미 이후에 오랜만에 이어진 한국 소프라노의 메이저 리그 진출이라는 점에서 더 반갑다. 테너나 베이스 중 유럽 주요 극장에서 활약하는 성악가는 많지만, 소프라노는 상대적으로 약세였다.

임세경은 몰락한 집안의 딸로 게이샤가 됐으면서도 사랑을 찾아나서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적극적인 초초상을 치밀하게 연기했다. 첫 등장부터 목덜미가 살짝 관객에게 보이도록 몸을 약간 비틀었다. "게이샤들은 목덜미가 살짝 보이도록 해서 남자를 유혹했답니다." 걸음걸이 하나까지 세심하게 계산했다. 핀커튼과 첫날밤을 맞는 장면에서 부른 사랑의 이중창은 상대역이 밀릴 만큼, 힘 있는 소리로 압도했다. 아들을 떠나보내면서 자결하는 피날레 장면까지 한순간도 놓치기 어려울 만큼 긴장의 밀도가 대단했다.

빈 '나비부인'은 세계 각국 정예 선수로 꾸린 다국적 팀 같았다. 핀커튼은 베네수엘라 출신 테너 아킬레스 마차도(Machado·42)였고, 하인 스즈키는 불가리아 메조소프라노 나디아 크라스테바였다. 1층 객석엔 기모노 차림 일본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26일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나비부인’초초상으로 데뷔한 소프라노 임세경. 압도적인 성량으로 극장을 지배했다. /빈 국립오페라 Michael Poehn
26일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나비부인’초초상으로 데뷔한 소프라노 임세경. 압도적인 성량으로 극장을 지배했다. /빈 국립오페라 Michael Poehn
한양대 성악과 출신인 임세경은 꿈꾸던 이탈리아 유학을 한동안 미뤄야 했다. 대학 졸업반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집안이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다. 사설 음악학원에서 3년간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유학비를 벌었고, 2001년에야 밀라노행 비행기를 탔다. 베르디 음악원에 다니면서 라 스칼라 극장 연주자 과정을 밟을 때도 쉽지 않았다. 극장 캐스팅 담당자는 키 작고 볼품없는 동양인 임세경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2년간 찬밥 신세였다. 어느 날 그 앞에서 노래할 기회가 생겼다.

"노래가 끝난 뒤, '미안하다. 내가 널 잘못 평가한 모양이다. 1년만 더 있어달라'며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 후 임세경은 이 극장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 투테' 주역을 맡는 등 여러 차례 배역을 따냈다. 2011년 국립오페라단의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와 2013년 서울시오페라단 '아이다' 주역으로 국내 무대에도 선보였다. 특히 3000석 넘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부른 아이다는 대극장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인상 깊은 호연(好演)이었다.

빈 오페라극장 데뷔는 임세경의 힘겨운 음악 인생에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첫날 공연을 본 극장 관계자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내년 시즌에도 또 '나비부인'을 할 것 같습니다." 임세경은 "'나비부인'으로 런던 로열오페라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 진출한 후, '가면무도회'나 '운명의 힘' 같은 베르디 오페라 주역을 따내고 싶다"고 했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지만, 아시아 소프라노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나비부인' 말곤 별로 없었거든요. 남자 성악가들보다 텃세도 심한 편이고요." 임세경은 30일과 2월 2일 두 차례 더 빈 국립오페라에서 초초상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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