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구입 예산 0원… 청와대엔 예술이 있나

입력 : 2015.01.20 02:37

['문화의식' 부족한 靑·국회]

미술 시장 6300억 확대 계획
외신으로 홍보되는 靑그림… 작품 관리·구입에 소홀해

국회, 50만원 넘는 그림 못사… 예술품을 비품 취급하기도

지난해 9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미술 진흥 중장기 계획'을 발표했다. 2018년까지 미술시장을 6300억원 규모로 확대해 세계무대에서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그러나 정작 미술계에선 금전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정부가 나서 미술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제사회를 향한 한국의 얼굴이라 할 청와대·국회에 걸리는 미술 수준부터 업그레이드해서 국격(國格)에 맞는 '문화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있는 미술품도 관리 못 해온 청와대

청와대는 안방에서 우리 그림을 해외에 홍보할 수 있는 창(窓)이다. 외국 귀빈이 청와대 방문 시 찍은 사진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면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본지 취재 결과 청와대 자체 소장 예술품은 김기창 '산수', 전혁림 '한려수도', 서세옥 '천지', 이영찬 '풍악' 등 300여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김환기 '무제' 등 20점), 서울시립미술관(장욱진 '나무' 등 4점), 미술은행(김용중 '근원' 등 2점) 등에서 빌린 작품도 30여점 된다고 한다.

백악관은 5000여점 소장… 청와대는 300여점 -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모습. 벽 중앙에 렘브란트 필이 그린 조지 워싱턴 대통령 초상화가 걸려 있고, 왼쪽엔 조지 쿡의 풍경화가, 오른쪽엔 토머스 모런의 풍경화가 걸려 있다. 토머스 모런은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가 성공한 화가. 양국의 우호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Getty Images 멀티비츠
백악관은 5000여점 소장… 청와대는 300여점 -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모습. 벽 중앙에 렘브란트 필이 그린 조지 워싱턴 대통령 초상화가 걸려 있고, 왼쪽엔 조지 쿡의 풍경화가, 오른쪽엔 토머스 모런의 풍경화가 걸려 있다. 토머스 모런은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가 성공한 화가. 양국의 우호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Getty Images 멀티비츠
오바마 대통령 등 외국 정상 방문 때 청와대 그림 자문을 했던 전 국공립미술관장 A씨는 "수작도 몇몇 점 있지만, 작가가 직접 기증한 수준 이하의 작품도 많더라. 우리를 대표하는 그림들이라기엔 민망한 수준"이라고 했다. 청와대 미술품 사정에 밝은 화랑 대표 B씨는 "모 전직 대통령은 친분 있는 화가 그림으로 연회장을 도배하다시피 했고, 퇴임하면서 그림을 가지고 나오는 대통령도 있었다. 청와대 그림을 개인 자산처럼 생각했다"며 "고미술에 조예 깊었던 김대중 대통령 때에 이르러 전문가에게 의뢰해 작품을 배치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작품 관리도 문제다. 청와대 미술품 관리에 관여했던 미술전문가 C씨는 "청와대 수장고가 습한 편이라 변색된 그림이 꽤 있더라"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2008년 이후 미술품 구입 명목으로 편성된 예산은 없다"고 밝혔다. 2007년 신정아 사건, 2008년 서미갤러리 삼성 비자금 연루 사건 등으로 미술이 비리의 온상처럼 여겨지면서 청와대가 작품 구입에 부담을 느끼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청와대 그림 관리는 총무비서관실에서 담당한다.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이명박 정부 중반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가 파견 근무를 했지만 현재는 전문 인력이 없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인 1961년부터 내부에 학예실(White House Office of the Curator)을 두고 소장 예술품 5000여점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온 백악관과 대조적이다. 현재 윌리엄 올먼 백악관 7대 학예실장은 40년 가까이 백악관 큐레이터로 일했다. 스스로를 국가 문화유산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여기는 백악관은 2011년 스미스소니언 렌윅 미술관에서 소장품전을 열기도 했다.

50만원 이상 그림은 못 사는 국회

지난 2013년 리모델링을 마친 국회 의원회관에는 예술품 12점이 전시돼 있다. 3층에 걸려 있는 김종학 대형 그림 '숲'을 비롯해 이용백 사진 '엔젤 솔저', 신진 작가 이창원의 조각품 '목동과 왕관' 등이 곳곳에 있다. '숲'을 제외한 11점은 리모델링할 때 구입했다.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라 건축 비용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5억5700만원을 미술품 구입 및 설치에 사용했다.

이를 제외하고 국회가 소장한 대다수 미술품은 기증받은 작품들이다. 현재 국회사무처가 218점(62점 대여 포함), 국회도서관이 365점을 각각 관리한다. 소장 가치가 크거나 1980년대 이전의 오래된 그림은 주로 국회도서관 소속이다.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은 "선진국 의회를 보면 그 나라 대표 작가 작품을 구입해서 자연스럽게 그 나라 문화를 소개한다. 그게 바로 문화 저력인데 우리는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했다. 현재 국회에선 물품관리법 시행령에 따라 50만원이 넘는 미술품은 구입하지 못하게 돼 있다. 박 총장은 "그 돈으론 작품을 살 수 없으니 좋은 작품을 빌려와야 하는데 대여료가 부담돼 쉽게 빌릴 수도 없다"고 했다. 국회사무처에도 전문 큐레이터는 없다.

국회 역시 작품 관리는 엉망이다. 장우성의 벽화 '백두산 천지도'는 국회의사당을 지을 때 벽에 맞춰 주문 제작한 작품. 1000호(가로 650㎝, 세로 190㎝)에 달하는 대작을 설치하기 위해 의원식당 맞은편 벽면을 새로 설계했다. 하지만 미술계 인사 D씨는 "몇 년 전 리모델링할 때 그림을 뜯어서 엉터리로 표구해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귀한 작품을 비품 취급하는 국회 수준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씨는 "청와대와 국회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그곳의 문화적인 색깔이 달라져서는 곤란하다. 정통성·역사성을 일관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예술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희영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청와대·국회가 적더라도 상징적으로 미술품 구입 예산을 책정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전문 큐레이터를 둬 소장한 미술품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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