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도 관객도 푸른 옷의 뮤지컬

입력 : 2014.12.10 04:47   |   수정 : 2014.12.10 10:03

살인죄 저지른 10代 다혜, 목숨 끊으려던 수진이, 우울증 앓던 안나도 공연 통해 다시 웃게 돼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노래 '거위의 꿈'이 흐르는 교도소 감방 안. 열여덟 다혜(가명)가 늦은 밤 홀로 깨어 독백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됐다. 같은 방 여성 수형자 7명은 코를 골며 잠들어 있다. 극중 출소를 며칠 앞둔 다혜가 "두려워. 난 여기 너무 오래 있어서 여기가 더 편한데…"라고 말했다. 하나 둘 깨어난 동료들이 각자의 꿈 얘기를 시작한다. 개그우먼, 디자이너, 요리사, 간호사, 경찰관 등 이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꿈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꿈을 차례로 말하는 순간 푸른색 죄수복이 허물처럼 벗겨졌다. 그 안에 숨겨진 것은 각자의 꿈을 상징하는 옷이었다.

9일 오후 3시 뮤지컬 '별빛달빛' 공연이 열렸다. 공연 장소는 충북 청주여자교도소 강당, 배우들은 여성 수형자 8명, 관객은 300여명의 여성 수형자였다. 살인죄로 12년형을 살고 있는 다혜(18), 한국에 시집왔다 교도소에 갇힌 러시아 출신 율리아(40·가명·살인·징역15년)와 우즈베키스탄 출신 안나(31·가명·강도상해·징역3년6개월), 감방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수진(31·가명·살인·징역4년)씨가 수형자들의 꿈을 때론 노래로, 때론 대사로 토해냈다. "그냥 자겠다"는 율리아의 엉덩이를 안나가 툭툭 차며 말했다. "신입이 이렇게 해가지고 밥 벌어먹고 살겠냐. 빨리 일어나!" 어설픈 우리말 대사에 푸른 옷의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9일 오후 충북 청주여자교도소 강당에서 무대에 오른 여성 수형자 8명이 뮤지컬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들이 공연한 창작 뮤지컬‘별빛달빛’은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온 뒤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가는 수형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신현종 기자
9일 오후 충북 청주여자교도소 강당에서 무대에 오른 여성 수형자 8명이 뮤지컬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들이 공연한 창작 뮤지컬‘별빛달빛’은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온 뒤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가는 수형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신현종 기자
9일 국내에선 유일하게 여성 수형자를 수용하는 청주여자교도소 대강당에서 뮤지컬 ‘별빛 달빛’공연이 개최됐다. 오프닝 공연으로 크로스오버 여성 전자현악팀 '일렉쿠키'가 화려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일렉쿠키'는 클래식에서의 피아노 트리오(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전자악기로 전환해 연주하는 여성 트리오다. /신현종 기자
지난 5월부터 이들에게 뮤지컬을 가르쳐온 이대영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배역을 맡은 8명에게 "각자의 꿈을 글로 써보라"고 했다. 그들의 마음이 담긴 편지가 곧 대본이 됐다. "어릴 적 바쁜 엄마 아빠 대신 고양이, 강아지들과 놀았습니다. 언제나 혼자 마당에서 땅 파고 놀았습니다. IMF가 오고 집이 어려워졌습니다. 무섭고 외롭고 괴로운 시절이었습니다."(수진)

"처음 아빠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저 역시도 같은 죄인'이라고 하시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내 인생이 벌써 끝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분명한 건 이곳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는 것입니다." (혜영·가명·21·징역3년6개월)

"아빠처럼 멋진 경찰이 되고 싶었습니다. 경찰 시험에도 합격했지만 무슬림이었던 할아버지의 반대로 포기했습니다. 한국 남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다 제 삶이 깨졌습니다. 건강한 마음과 몸으로 좋은 아내, 엄마 그리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안나)

지난 7개월간 인순이의 '거위의 꿈', 이한철의 '슈퍼스타' 등 희망을 담은 노래를 부르며 출연자들은 조금씩 바뀌었다. 심한 우울증으로 얼굴이 마비됐던 안나는 활짝 웃게 됐고,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했던 혜영이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웠다.

성매매를 알선했다가 교도소에 오게 된 혜영이의 꿈은 교도관이다. "저처럼 잘못해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또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을 제가 바뀐 것처럼 바뀌게 도와주고 싶어요". 5월부터 9급 교정직 공무원 공부도 시작했다. "전과가 있으니까 실현 가능성이 없는 꿈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번 뮤지컬에서 저는 이루지 못할 수도 있는 그 꿈을 이뤘어요."

뮤지컬 막바지. 혜영이가 혼잣말을 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나쁜 짓 많이 했어. 여기 올 때 엄마 아빠 눈물을 봤어. 나 이제 마음잡고 공부해서 멋진 교도관이 될 거야. 다신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들 없게. 따듯하게 새 삶을 가르쳐 줄 거야." 함께 연기하던 배우들도 지켜보던 수형자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뮤지컬은 몇 년 후 모두가 출소해 각자의 꿈을 이루는 장면으로 막을 내렸다. "괜찮아 잘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 괜찮아 잘될 거야 우린 널 믿어 의심치 않아 너만의 살아가야 할 이유 그게 무엇이 됐든 후회 없이만 산다면 그것이 슈퍼스타!" 교도소 속 교도소를 그린 45분 뮤지컬의 마지막 곡이 울려 퍼졌다. 갈 곳 없는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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