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4.04 01:15
['제24회 이해랑연극상'받은 박명성… 배우·연출자 아닌 제작자로는 처음]
맘마미아 등 성공시킨 뮤지컬 代父, 땀 냄새 그리워 6년전 연극 돌아와
작품성 있는 중·대극장 연극 기획 "가벼운 얘기보다 고전이 오래 가"
"이해랑연극상의 지평(地平)이 이로써 한 단계 넓어졌다." 제24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로 박명성(51) 신시컴퍼니 대표를 선정하며 심사위원들이 한 말이다. 지금까지 한국 연극계의 대표적 상인 이해랑연극상의 수상자는 배우나 연출가·스태프였을 뿐 프로듀서(제작자)가 호명된 적은 없었다. 우리 연극의 취약 분야였던 기획과 제작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동시에, 그 중요성을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박명성이라는 얘기가 된다.
한국 뮤지컬계의 대부(代父)로 알려진 그가 '연극상'을 받는 이유 중에는 연극을 향한 '귀소(歸巢)본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당초 연극판에서 이력을 시작한 그는, 뮤지컬의 성공으로 얻은 수익을 연극에 투자했다. 품질 좋은 연극을 만들어 관객의 관심을 끌며, 일부 연극에서는 다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한국 뮤지컬계의 대부(代父)로 알려진 그가 '연극상'을 받는 이유 중에는 연극을 향한 '귀소(歸巢)본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당초 연극판에서 이력을 시작한 그는, 뮤지컬의 성공으로 얻은 수익을 연극에 투자했다. 품질 좋은 연극을 만들어 관객의 관심을 끌며, 일부 연극에서는 다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너는 배우도 연출도 젬병이구나! 기획 일이나 해 봐." 1987년, 연극판에 입문한 지 5년 된 스물네 살 청년 박명성은 극단 대표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 돌이켜 보면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기획 일'이라는 것은 가계부 적고 표 팔러 다니며 광고물을 만드는 일까지 온갖 일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미개척 분야였기 때문에 현장에서 맨몸으로 부딪쳐 가며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고 회고한다.
1998년 국내 첫 정식 라이선스 계약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더 라이프'를 들여온 뒤 그의 '뮤지컬 인생'이 시작된다. '갬블러'와 '댄싱 섀도우'의 흥행 실패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렌트' '맘마미아!' '아이다' '시카고' 등 대형 뮤지컬을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런 그가 2008년부터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연극과 뮤지컬을 동시에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10년 뮤지컬을 만들다 보니까…. 사람 냄새 땀 냄새가 나는 동네가 다시 그리워졌다고 할까? 연극에는 아직도 인정(人情)과 보살핌의 미덕이라는 게 있지 않나. 젊은 시절 그 뜨거웠던 열정도 다시 생각났다."
작품성을 갖춘 연극을 제대로 기획하면 안 될 것도 없다 싶었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중·대극장 연극을 집중 공략했다. "대학로에 이미 200곳 가까운 소극장이 있다. 그걸 내가 또 할 필요는 없었다."
'푸르른 날에'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 같은 창작 연극, '대학살의 신' '레드'등 해외 작품들이 그의 기획으로 무대에 올랐다. '엄마를 부탁해'로 연극에선 드문 2억원의 수익을 내기도 했다. "처음엔 관객의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가벼운 얘기보다는 주제가 진중하고 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연극이 길게 가더라. 구조적으로 스토리가 탄탄한 고전(古典)은 과연 힘이 있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연극을 만드는 작업은 여전히 어려웠다. "한 작품 한 작품을 만들면서 '아, 나는 왜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걸까'라고 느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연극이란 원래 완성품이 없는 예술이 아닌가. 늘 벽에 부닥치면서도 공연마다 조금씩 더 좋게 만들어가는 과정에 연극의 마력(魔力)이 있다."
그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관객이 내가 만든 작품을 보고 극장 문을 밀고 나오면서 짓는 행복한 표정, 그걸 보고 '다음에는 저들에게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를 생각하는 모험과 도전을 그만둘 이유가 있겠는가."
1998년 국내 첫 정식 라이선스 계약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더 라이프'를 들여온 뒤 그의 '뮤지컬 인생'이 시작된다. '갬블러'와 '댄싱 섀도우'의 흥행 실패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렌트' '맘마미아!' '아이다' '시카고' 등 대형 뮤지컬을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런 그가 2008년부터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연극과 뮤지컬을 동시에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10년 뮤지컬을 만들다 보니까…. 사람 냄새 땀 냄새가 나는 동네가 다시 그리워졌다고 할까? 연극에는 아직도 인정(人情)과 보살핌의 미덕이라는 게 있지 않나. 젊은 시절 그 뜨거웠던 열정도 다시 생각났다."
작품성을 갖춘 연극을 제대로 기획하면 안 될 것도 없다 싶었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중·대극장 연극을 집중 공략했다. "대학로에 이미 200곳 가까운 소극장이 있다. 그걸 내가 또 할 필요는 없었다."
'푸르른 날에'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 같은 창작 연극, '대학살의 신' '레드'등 해외 작품들이 그의 기획으로 무대에 올랐다. '엄마를 부탁해'로 연극에선 드문 2억원의 수익을 내기도 했다. "처음엔 관객의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가벼운 얘기보다는 주제가 진중하고 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연극이 길게 가더라. 구조적으로 스토리가 탄탄한 고전(古典)은 과연 힘이 있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연극을 만드는 작업은 여전히 어려웠다. "한 작품 한 작품을 만들면서 '아, 나는 왜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걸까'라고 느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연극이란 원래 완성품이 없는 예술이 아닌가. 늘 벽에 부닥치면서도 공연마다 조금씩 더 좋게 만들어가는 과정에 연극의 마력(魔力)이 있다."
그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관객이 내가 만든 작품을 보고 극장 문을 밀고 나오면서 짓는 행복한 표정, 그걸 보고 '다음에는 저들에게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를 생각하는 모험과 도전을 그만둘 이유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