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자유로움, 조재현

입력 : 2013.12.20 11:08

“외모만큼 중요한 게 나이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이에요. 의도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나이가 됐어요, 이젠. 예전에는 그런 거 없어도 멋이 났는데, 이제는 의도적으로라도 훌륭한 선택을 해야 하고, 남들이 봤을 때 괜찮은 행동을 해야 돼요.”


쉰이라는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있는 배우 조재현의 말에는 깊이가 있었다.


올해는 조재현을 특히 자주 만났다. 영화 <뫼비우스>를 개봉하는 자리에서, 드라마 <스캔들 : 아주 부도덕한 사건>과 관련해 마련된 인터뷰 자리에서, 일산에서 열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도. 그리고 이번에는 대학로에서 만났다. 제작자이자 주인공으로 나선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이 앙코르 공연에 들어갔고, ‘수현재’라는 이름의 극장도 짓고 있다고 한다. 드라마가 종영됐으니 이젠 대학로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겠다고 했더니, 당장 내일 새벽부터 드라마 촬영으로 지방에 가야 한단다. 내년 1월에 방영될 KBS 드라마 <정도전> 촬영에 돌입했다.


“사실상 제 일상이 무리한 스케줄이긴 해요. 쉬어주는 게 맞지만, 한 우물을 파려면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학교 갈 시간이네요.”


연기 이외에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 미디어영상연기과 부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드라마 촬영으로 자리를 많이 비웠던 터라, 오늘은 절대 빠질 수가 없단다. 시간을 쪼개서 활동하는 덕분에 인터뷰 역시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했다.



평생 꿈꾸던 공간,
대학로 극장 ‘수현재’


흔히 나이가 들수록 슬픈 이유가 꿈이 없어져서라고 한다. 그는 평생 꿈이던 ‘대학로에 극장 짓기’라는 꿈을 최근에 이루고 있다. ‘수현재’라는 이름을 짓고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은 2백50석, 3백 석, 4백 석 규모의 극장 3개를 갖춘 6층 건물이다. 그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연극과 독립영화 전용관을 지을 생각이다.


“예전부터 꿈꾸던 일이에요. 돌아가신 형의 이름(수현)을 따서 수현재라고 지었어요. 대학로에서 태어난 형과 제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곳이라서 더 의미가 깊어요.”


그는 수현재가 30대 이상 중·장년층이 문화생활에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공연도 보고 데이트도 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건물 옥상 야외에서는 맥주도 한잔할 수 있는, 어른들도 거부감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선배 연기자로서 책임감을 갖게 하는 부분도 있다. 낮 시간을 이용해서는 힘들게 활동하는 독립영화인과 연극인들에게 개방할 생각이다.


“‘김기덕 시네마’를 오픈해서 낮 시간에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해요. 대부분의 공연은 저녁에 있으니까요.”


그가 생각하는 연극의 매력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연극 한 편을 올리기 위해서는 기획부터 연습, 공연 기간까지 5~7개월을 참여해야 하는데, 수입으로 따지면 드라마 한 회 개런티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돈의 가치로 따지면 답이 나오지 않지만 그럼에도 연극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발가벗은 느낌이 들지만, 연극 무대에서는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그래서 계속 연극 무대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결혼 25주년,
가족이라는 울타리


쉼 없이 활동을 하지만 그가 꼭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아내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정신없이 달렸지만, 또한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왔다. 배우 조재현 이전에 인간 조재현의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올해 결혼 25주년이 됐어요. 은혼식이라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일 년 내내 시간이 나지 않다가 <스캔들> 끝나고 일정을 잡았어요. 일주일 정도 다녀왔어요. 덕분에 지금 일이 몰려서 더 힘들지만.”(웃음)


언제나 다른 배역에 몰입해서 살아가는 일상이지만, 그에게는 가족이 인생의 중심이다.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절대적인 행복의 순간이다. 훈남 쇼트트랙 선수인 아들과 연기자를 꿈꾸는 딸 역시 그의 가장 소중한 울타리다.


“아들이 군대에 가 있어요. 상무 소속인데, 국가 지원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웃음) 문경 선수촌에 있는데, 아이스링크가 없어서 대구까지 왕복 400㎞를 오가며 연습하고 있거든요. 이게 굉장히 열악해요.”


국방부에 대한 건의 사항이 있다면서 말을 꺼내더니, 결국 은근한 아들 자랑으로 이어졌다. 최근 열린 쇼트트랙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500m 은메달을 차지했단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기자의 길을 꿈꾸는 딸은 연극에 함께 참여하면서 화제가 됐다. <그와 그녀의 이야기> 팀에 들어와서 소품 일이나 배워보라고 권했단다.


“처음에는 제가 하는 연극은 안 시킬 생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제가 연습실에 올 시간이 거의 없어요. 부딪칠 일이 없으니까 해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제가 제작하는 연극에 출연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안 좋을 수 있겠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죠.”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딸 혜정 양은 스태프들과 함께 연습실을 지킨다. 작은 역할이라도 출연할 가능성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건 연출자가 냉혹하게 판단할 일이라고 엄정한 멘트를 건넸다.


쉰이라는 나이를 받아들이며
멋있는 중년이란?


“아, 내년에 내가 쉰이 되는군요? 전혀 모르고 있었네!”


인터뷰를 나누다가 내년에 자신의 나이가 쉰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꼭 10년 전, 마흔이 될 때도 많은 생각을 했다면서, 이번에도 많이 충격적이라고 한다.


“나는 마흔이 될 때 정말 우울했어요. 충격적이었고. 지금은 그때만큼 우울하진 않지만,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네요.(웃음) 그땐 영원히 청춘일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나이를 많이 먹었더라고요.”


쉰 즈음 대다수의 중년이 그러하듯, 조재현 역시 세상을 포용하는 넉넉한 마음과 유연함을 갖추고 있었다. 중년이 주는 자유로움을 잘 알고 본인에게 주어진 나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40대에 비해서 모든 것이 젊어지고 있다면서 쉰을 맞는 감회를 말했다.


“40대는 지나간 30대를 부여잡고, 마치 30대와 라이벌 관계처럼 살았던 시간인 것 같아요. ‘그래도 내가 너보단 잘났어!’ 하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좀 눌려 있었죠, 30대에게. 치인 40대라고 해야 하나? 50대는 그것보다 훨씬 건강하고 젊은 나이가 될 것 같아요. 30대와 40대가 부러워할 수 있는 나이가 50대인 것 같아요.”


그가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섹시하고 멋있는 중년이라는 말이다. 선이 굵은 잘생긴 외모는 타고나는 것이라지만, 세월이 주는 멋스러움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때문에 반백의 헤어스타일을 했는데, 괜찮더라고요. 이젠 굳이 염색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예전에는 흰머리가 조금만 보이면 염색하러 가기 급급했어요. 물론 배우로서 너무 흰머리를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저는 나이 든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어요. 조지 클루니처럼.”


흰머리에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그는, 지금보다 흰머리가 조금 더 생겨도 괜찮을 것 같단다. 무엇이든 나이에 걸맞게 해야 하는 게 있는데, 특히 억지스러운 꾸밈은 절대 피해야 할 것이란다.


“외모만큼 중요한 게 나이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이에요. 의도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나이가 됐어요, 이젠. 예전에는 그런 거 없어도 멋이 났는데, 이제는 의도적으로라도 훌륭한 선택을 해야 하고, 남들이 봤을 때 괜찮은 행동을 해야 돼요.”


쉰을 맞이하는 배우 조재현은 멋있는 중년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돈, 명예 모든 것을 갖추면 좋겠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중년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중년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자꾸 젊음을 부러워하고 좇으려고 하면 진정한 중년의 멋이 없어져요. 젊은 시절의 피부, 그때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추구하려니 얼굴도 이상하고 정신도 이상해지는 거예요. 중년을 중년답게 끌고 가는 모습에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지난 세월을 부여잡으려고 하면 안 돼요. 그럴수록 불쌍하고 안타까운 선택만 하게 돼요.”


연말부터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는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은 50대 중반의 남녀가 겪는 사랑과 이별, 애정과 증오, 갈등과 화해를 통해 남녀의 본질적인 차이와 인생을 그린 작품이다. 지난해 11월 조재현이 기획한 ‘연극열전4’의 창작 초연작이었다. 이번 앙코르 공연에 다시 오르는 조재현은 주인공의 나이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쉰이라는 나이가 무엇인지, 인생의 깊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가 있기에 앙코르 무대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임언영 기자 | 사진 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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