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난새에게 경계란 없다. 미국 맨해튼에서 뮤직 페스티벌을 주최하는가 하면, 농어촌희망청소년오케스트라(KYDO)의 지휘자로 나서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는 “금난새라서 잘할 거야”라는 기대 어린 시선에 대해서도 자유롭다.

서울예술고등학교 신임 교장의 연설 시간. 학생들은 새로운 교장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조회에 섰다. 그런데 연설하는 교장의 두 손에는 온갖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충분히 훌륭하지만, 저는 이 학교가 더 좋은 학교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아까 오는 길에 휴지가 널려 있더군요. 이렇게.”
그리곤 그 전단지들을 하나씩 바닥에 버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그의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봤고, ‘교장이 어딘가 불편한가?’ 하는 생각까지 미쳤다. 환경 미화에 대한 긴 잔소리를 시작할 태세였다. 그러나 교장의 다음 말은 아이들을 더 당황케 했다.
“첫째,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선생님)의 잘못이에요. 왜? 학교에 쓰레기통이 없으니까요.”
이번에는 교사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학생들을 나무라는 게 아니라, 휴지통을 눈에 띄는 곳에 두어야 해요. 그건 하지 않고 왜 지저분하게 하냐고 야단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앞으로 저는 교사들과 함께 여러분이 더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금난새 교장의 연설은 간결하고 인상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가진 능력이다.
‘금난새 교장’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지휘자 금난새. 그는 매우 특별한 음악인이다. 음악인이면서 기업인이고, 또 기획자이자 교육자다. 그는 현재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를 맡고 있으며, 유라시안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겸 CEO고, 창원대학교 석좌교수이자, 맨해튼 페스티벌 음악감독, 라움아트센터의 예술감독, KYDO 예술감독 등 수많은 직함을 가졌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에서 그는 지난 10월 10일 모교인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가 무대가 아닌 학교 강단에 선 이유는 무엇일까.
연주 일정도 빠듯한데, 이번에 또 하나의 직함이 추가됐어요. 어떻게 서울예고 교장직을 맡게 됐나요?
서울예고 교장이 되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거예요. 제가 교장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어요. 서울예고 동문으로, 개교 6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지휘를 했는데, 그때 이사장님이 제 연주를 보고 “정말 좋았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새 교장이 필요한데, 교장이 되어달라”고 했죠. 처음에는 이사장님이 제게 누군가를 추천해달라고 하는 줄 알았어요. 저는 당연히 “시간이 안 된다”라고 했죠. 그런데 제게 “1년에 3일만 나오면 된다. 매일 나와서 결재하는 교장은 많다. 그런 교장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시더군요. 아마 제 행적을 다 알고 계신 것 같았어요. 솔직히 1년에 3일을 내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아요. “오케이, 아윌 두잇!(네, 그럼 할게요)”이라고 답했죠.
정말로 1년에 3일만 나가는 건 아니죠?
그럼요.(웃음) 일주일에 한 번은 나가려고 노력합니다. 학교를 위해 정말 효과적인 아이디어를 내려고 해요. 명문으로 지난 60년 동안 좋은 점이 많았지만, 가려진 부분도 분명 있어요. 저는 그걸 잘 알고 있죠.
‘금난새 교장’은 무언가 다를 것 같은데,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나요?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고, 교육자로서 새로운 태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접근 방식이요. 제가 50년 전 이 학교를 다닐 때는 ‘내가 교장이라면 이러지 않을 텐데.’ 하는 게 많았어요. 지금 교장이 되어보니, 학생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학생이라면 무엇을 원할까’를 생각하게 되었죠.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제가 소위 목에 힘주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권위를 세우기보다는) 아이들이 즐겁게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학생들이 교사에게 고개 숙이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데, 그러지 말고 서로 짧게 인사하는 방법을 서로 찾아보자고 제안했어요, 학생들에게. ‘안녕’이라는 의미가 담기면서,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말을 만들자고요.
재미있는 제안이네요. 그렇지만 워낙 유능한 학생들이 모인 예고인 만큼 또래 친구들끼리 경쟁도 피할 수 없겠죠?
네, 맞아요. 저는 그런 데서 변화가 생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평가받으려고 하는 음악은 미래가 없어요. 골프가 유행이라고 해서 모두 골프선수가 되어야 할까요?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만 성공적인 본보기를 만들어야겠죠. 예고가 변함으로써 한국의 예술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창원대학교 석좌교수도 겸임하고 있네요.
창원은 GNP가 3만 달러가 넘지만, 기업이 많은 대신 문화가 부족해요. 창원대가 창원을 변화시키기 위해 저를 불렀어요. 멋있는 이야기죠? 창원대에서 오케스트라 아카데미를 하고 있었는데, (좀 자랑 같지만) 창원대 총장이 “학장이 되어달라”고 요청해왔죠. 전혀 인연이 없던 분이었어요. 저는 예고 상황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죠. 그랬더니 그분이 똑같은 제안을 했어요. 실무는 따로 지정한 부학장에게 맡기고, 제게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달라고요. 그런데 정년에 걸리는 바람에 창원대 최초의 석좌교수가 됐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를 내고 있나요?
포항에서는 4년째, 창원에서는 지난해부터 오케스트라 아카데미를 시작했어요. 포스코가 포항공대를 만든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졸업생이 노벨상을 탔으면 좋겠다’라는 거였대요. 그래서 투자를 많이 했는데 아직 한 명도 나오지 못했죠? 한번은 제가 총장에게 “오케스트라 아카데미를 하면 어떨까요?” 하고 제안했어요. 공대에 집중하느라 예술은 없었거든요. 이 취지가 좋다고 누군가가 16억 원을 기증하기도 했어요. 매해 공대 학생들 모아놓고 오케스트라 아카데미를 해요. 예술을 아는 공학도가 더 많이 생긴다면 노벨상 수상을 좀 더 빨리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요? 또 그 아이들이 CEO가 된다면 문화에 대해 생각하고 투자할 거라고 생각해요.
금난새는 음악계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그는 순수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로는 드물게, 기획력과 사업 수완을 두루 갖췄다. 먼저 그의 기획력은 클래식 음악 시장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금난새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해설이 있는 음악회’는 엄숙한 분위기가 당연했던 클래식 음악 공연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재치 있는 입담과 악장 사이에 박수를 쳐도 용인하는 부드러운 분위기는 새로운 공연 문화를 만들어냈고, 클래식 음악을 모르는 사람조차 팬으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이제 새로운 공연 장르가 된 ‘브런치 콘서트’ 역시 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남편과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느라 공연장 한번 나올 시간이 없는 주부들에게 문화를 제공하는, 일종의 틈새시장이었다.

연주 일정이 빡빡한데,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내나요?
기업의 ‘그룹’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렇다고 제가 전자를 하다가 백화점을 하는 건 아니고, 전자를 하면서 컴퓨터나 휴대폰 등 비슷한 계열의 일들을 함께 하고 있는 셈이죠.
‘금난새’만의 시간 관리 비결이 있나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이거예요. 혹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궤도에서 벗어나더라도, 그걸 원래 내가 하고자 하는 꿈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거죠. 남들 눈에는 다양한 일을 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결국 하나예요.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소프트하게 잘 이루어져요. 때로는 신념이 필요하죠.
어떤 신념이 필요한가요?
제 일을 남이 알게 하는 건 필요하지만 어떨 때는 공개하지 않아요. 일이라는 게 너무 알리면 안 되기도 하거든요. 일단 시작한 다음, 나중에 성공한 뒤 자연스럽게 알려나가요. 처음에는 알리는 걸 자제하죠.
예를 든다면요?
9년 전에 제주 신라에서 페스티벌을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는 제주도에서 페스티벌을 한다는 게 정말 새로웠죠. 그러나 따로 언론 플레이를 하지 않았어요. 일의 목적상 (홍보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제 관심은 그곳을 찾은 사람들이었어요. 지금까지 잘하고 있으니, 제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알려지게 된 거예요. 나중에 잘되고 있는 걸 알고 제주시가 스폰서가 되겠다고 참가했죠. 보통 음악 페스티벌은 도나 시에서 주최하는데, 이와는 반대죠?
지난해 미국 맨해튼 페스티벌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남의 나라에 가서 페스티벌을 하려고 생각할까요. 저는 콤플렉스가 없었으면 해요. 어디서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맨해튼에서 페스티벌을 했어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왔고, 많은 기업들이 스폰서로 참가했죠. 정부에서 지원한 게 아닌, 여러 기업과 제가 함께 주최한 거예요. 이거 보세요.(스폰서 명단에 금난새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저는 고용된 입장이 아닌 스폰서와 똑같은 조건으로 참가했습니다.
음악가가 스폰서로서 공연에 참가한다는 발상이 참 새롭네요. 최근에는 선생님이 농어촌희망청소년오케스트라 키도(KYDO)를 3년간 지휘해온 것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죠.
사실 (프로페셔널 지휘자 중) 누가 그 일을 하겠다고 할까요? 저는 일의 목적과 보람을 위해서 시작했어요. 제가 시작할 때는 아무도 모르다가 스무 지역을 돌아다니고 나니까 이제야 ‘금난새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알려지더라고요.
웨딩홀이기도 한 라움아트센터 예술감독을 맡은 것도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던데.
라움아트센터 개관 기념 음악회를 맡게 됐는데, 공연이 끝나고 제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냐. 누군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에겐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했어요. 사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이곳 회장님이 그걸 알고 저를 만나자고 하셨어요. “이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내 집처럼 느껴졌다”고 하니, 그분이 “그럼 선생님 하이소!(선생님이 맡아주세요.)” 하고 답하셨죠. 말이 재미있지 않나요? 포인트는 이거예요. 우리 삶 속에서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까요? 모든 삶은 서로 윈윈하죠. 서로 행복해야 해요. 저는 이런 공간이 필요하고, 회장님은 이곳을 잘 사용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그동안 브런치 콘서트 세 번, 저녁 콘서트 세 번을 했는데 모두 매진됐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위트와 헝그리 정신
금난새의 이름은 잘 알려졌다시피 ‘나는 새’라는 뜻을 가진 국내 최초 한글 이름이다. 그 이름을 지어준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고 금수현. 음악 교과서에 수록된 가곡 ‘그네’로 유명한 작곡가 금수현은 교육자와 오케스트라 이사장 등을 두루 거친 음악인이다. 음악 용어를 한국말로 바꾸는 데 기여했으며, 1968년 영필하모니를 창단해 젊은이들을 위한 교향악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아버지 금수현의 행보는 금난새의 그것과 많은 부분 닮아 있다. 아버지가 물려준 위트와 파격, 아이디어는 가장 큰 유산이다.

창조적인 생각은 아버지를 닮았나요?
아버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죠. 아버지께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어요. 모든 자식들이 그렇듯이 아버지의 좋은 점을 배우지만 때로는 아버지의 실수를 통해 더 큰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하신 일 가운데 당시에는 타이밍이 안 맞아서 안 된 것도 있어요. 그래서 나는 알려야 할 것과 알리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구분하고 있는 거고요. 아버지의 실수가 큰 교육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그 당시 한글 이름을 지을 정도라면 아버지도 아이디어가 넘치는 분이었을 것 같은데.
예전에는 축구 경기를 하면 우리 팀이 골을 잘 못 넣었어요. 아버지는 그걸 보면서 연습하는 방법이 틀렸다고 하셨어요. 골대를 벽에 그리고 바둑판처럼 나눈 후 각각의 칸에 번호를 써요. 20번 하면 20번에 차는 연습을 하고, 5번 하면 5번에 차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요. 골키퍼가 30번에 서 있으면 그 반대쪽에 넣어야 하잖아요. 말 되죠? 아버지는 그런 기발한 말씀을 잘 하셨죠. 또 온 가족이 TV를 보다보면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런 민망한 장면이 나오면 아버지는 “얘들아, 천장을 봐라”라고 하시기도 했고요.
말을 재미있게 하시는 분이었네요.
아버지는 술을 안 드시면 말이 없으셨어요. 술을 마시면 난폭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아버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스타일이었죠. 그래서 우리 형제는 만날 아버지께 술을 권했어요.
한번은 술자리에서 주사가 있는 분이 있었나봐요. 그 사람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니 다들 긴장하기에, 제가 “괜찮다. 우리 아버지도 술을 드시면 오히려 재밌어지는 분이었다”라고 했더니, 그분이 긴장해서 말을 안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그러나 (식사 때) 칼도 있고 하니까 조심하세요. 아이 메이드 조크!(농담이에요!)” 하고 덧붙였죠.
아까 이야기한 아버지의 실수는 어떤 건지 궁금하네요.
아버지는 부산상고를 나오셨어요. 보통 부산상고 나오면 은행에 취직하잖아요. 아버지는 그게 싫어서 일본으로 도망을 가신 분이에요. 교장도 하시고, 작곡도 하시고, 다 좋았는데 마지막에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바람에 집안이 망했어요. 어느 순간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고, 빨간딱지가 집 안에 붙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왜 그러셨을까 했지만, 그건 아버지의 결정이었죠. 그 일화를 통해 내가 배운 건 “나는 가족을 절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하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그건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거죠. 제가 아내와 결혼할 때 이렇게 말했어요. “우동 장사를 하더라도, 먹여 살리겠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휘자 금난새’가 우동 장사를요? 의외인데요?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독립심이 강해졌어요. 현재는 지휘자이지만, 사정이 되지 않는다면 포장마차도 할 수 있어요. 지금도!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얼마나 보람이 되는지 느낄 수 있죠. 방송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저는 베개 두 개 가지고 결혼했어요. 겉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속이잖아요. 솔직히 유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아버지 돈이나 배경이 있다면 쉬웠겠죠. 그런데 저는 독일에서 공부할 때부터 부모님께 손 벌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지휘자가 KBS교향악단에 있다가 수원시립교향악단으로 갈 수 있겠어요. 월급이 3분의 1밖에 안 되는데. 그런데 저는 행동으로 옮겼어요. 언제든 어느 위치든 포장마차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는 말을 정말 잘 실천하고 있네요.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 쿠코(KUCO)에서 지휘를 해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지난해와 올해 예술의전당에서 쿠코를 지휘했으니, 할 만큼 했죠. 내가 어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땅끝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고 해서 제가 땅끝일까요? 그건 아니에요. 나를 필요로 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농어촌희망청소년오케스트라(KYDO)를 지휘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네요.
예술의전당을 보면서 ‘이런 건물이 다 있네.’ 하는 아이들이, 그곳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 전곡을 연주했어요. 그 아이들 추억의 가치는 무엇으로 계산할 수 있을까요? 추억의 자산을 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죠.
아버지처럼 언변도 있고 앞에 설 일이 많으니 정치 제안도 들어올 것 같은데, 정치는 어떤가요?
전혀! 제안을 받은 적도 없어요. 우선 그런 데 전혀 가지를 않아요. 모든 것이 타이밍이에요. 아버지의 생각도 틀린 건 아니었어요. 정치도 스페셜한 분야가 있잖아요. 교육 전문가, 문화 전문가…. 이론은 맞는데, 40년 전에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그렇긴 하죠. 예전에는 아버지가 부산에서 알려진 사람이었고, 누가 부추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실수였던 것 같아요. 정치는 확신을 가지고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건 단순한 교훈이 아니에요. 뼈저린 경험이에요.
자, 그럼 금난새가 앞으로 꿀 꿈은 무엇일까요?
언제부터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하고 있어요. 일단 하고 나서 보여주는 게 제 생각이에요. 꿈은 소박해요. 제가 하는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내 입장에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나는 나지만, 울릉도 아이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고, 제주도민이 되어보기도 하고, 예고 학생이 되어보기도 하고…. KYDO는 3년간 지휘해왔는데 반응이 좋아 계속할 생각이에요. 예를 들면 유엔이 있으니까 다들 들어가려고 하잖아요. 우리가 새로운 의미의 유엔을 만들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있는 것도 존중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낮게 낮게 사는 게 필요하겠죠. ‘금난새니까 잘하겠다’라는 콤플렉스는 없어요.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두경아 기자 | 사진 정현석 | 장소 협찬 라움(02-538-3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