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티스트 꿈꾸는 백혈병 소녀, '희망'을 만나다

입력 : 2013.11.13 03:04   |   수정 : 2013.11.13 10:15

['메이크 어 위시 재단' 행사로 에마뉘엘 파위 베를린 필 수석과 만남 성사]

아플 때도 음반 들으며 병마와 싸워
'우상' 파위 앞에서 연주 실력 뽐내…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악보도 받아

작년 8월 상진(14)이는 백혈병과 싸우느라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세 번째 항암 치료에 들어가면서 독한 항암제를 맞고, 화학 요법과 약물치료를 하느라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얼굴은 퉁퉁 부었다. 엄마 신지경(45)씨는 "부작용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갈 만큼, 하루하루가 불투명했다"고 했다. 그때 난치병 아동의 소원을 들어주는 '메이크 어 위시 재단(Make-A-Wish Foundation)'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적어내라"고 연락이 왔다.

플루티스트가 꿈인 상진이는 세계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로 꼽히는 에마뉘엘 파위(43)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을 만나고 싶다고 썼다. 신지경씨는 "소원이 이뤄지리라곤 생각 못했다. 안 되더라도,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을 쓰자고 해서 파위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백혈병과 싸우는 상진이는 에마뉘엘 파위(왼쪽)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이 나타나자‘아이돌 스타’를 만난 듯 소리를 질렀다. 상진이는 바흐 소나타를 파위와 함께 연주하면서“이게 정말 진짜인지 모르겠다”며 두근거렸다. /김연정 객원기자
백혈병과 싸우는 상진이는 에마뉘엘 파위(왼쪽)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이 나타나자‘아이돌 스타’를 만난 듯 소리를 질렀다. 상진이는 바흐 소나타를 파위와 함께 연주하면서“이게 정말 진짜인지 모르겠다”며 두근거렸다. /김연정 객원기자
백혈병과 싸우는 상진이는 에마뉘엘 파위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이 나타나자 '아이돌 스타'를 만난 듯 소리를 질렀다. 상진이는 바흐 소나타를 파위와 함께 연주하면서 "이게 정말 진짜인지 모르겠다"며 두근거렸다./김연정
12일 오후 5시, 상진이의 꿈이 이루어졌다. 내한 공연차 베를린 필과 함께 온 파위를 서울 예술의전당 출연자 대기실에서 만나게 된 것. 아침에 대구에서 아빠, 엄마, 오빠와 올라온 상진이가 파위 앞에서 플루트를 꺼냈다. 바흐 플루트 소나타 bwv 1031. 파위도 플루트를 꺼내 시작했다. 상진이가 지난 6월 대구에서 열린 콩쿠르에 참가해 우승한 곡이다. 발병 후 2년간 거의 연습을 못하다, 지난 5월부터 다시 레슨을 받기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거둔 성과다.

연주를 마친 뒤, 상진이가 "내 소리 어땠어요"라고 파위에게 물었다. "이건 아부가 아닌데, 정말 표현력이 뛰어나고 강렬하고, 생명력이 넘쳐요. 잔기술을 부리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을 갖고 있네."

딸의 연주를 지켜보던 신지경씨와 아빠 류성원(49)씨 두 눈이 촉촉해졌다. "아픈 뒤로 폐 기능이 약해져서 플루트를 거의 못 불고, 가끔 병실에 가져와 쳐다보기만 했는데…." 상진이도 "병원에서도 되게(매우) 연습하고 싶었는데 속상했다"고 했다.

파위는 상진이에게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악보 두 권과 자신의 음반들을 선물했다. "협주곡 G장조는 내가 플루트를 하게 된 계기가 된 곡이에요. 우리 가족은 음악과는 상관이 없는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음반 연주를 듣고 플루트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D 장조는 1992년 베를린 필 오디션을 볼 때 연주한 곡이에요. 둘 다 내 음악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작품이지요. 상진이도 나만큼 이 음악을 좋아했으면…."

아빠 류성원씨는 "딸이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파위의 음악과 동영상을 보면서 힘든 시간을 견뎠다. 당신이 한 소녀를 살렸다"고 했다. 파위는 "열넷, 열여섯 살짜리 아들만 둘이다. 나에게도 오늘 이 순간이 소중하다. 내 삶과 직업의 의미를 깨닫게 해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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