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여덟, 무대에 선다… 배우 값 하려고

입력 : 2013.11.11 03:05   |   수정 : 2013.11.11 09:37

[연극 '바냐 아저씨' 배우 백성희]

88세 국립극단 유일의 단원… 짧은 대사·적은 동작으로도 극 중심에 서는 그녀의 존재감
"힘들지만 무대가 내 진통제"

올가을 놓치지 말아야 할 연극이 한 편 있다면 명동예술극장의 '바냐 아저씨'다. 셰익스피어만큼이나 끊임없이 올라오는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이지만 연출가 이성열의 치밀한 해석과 한명구·황정민·이지하 등의 열연으로 이번에는 유독 다가온다.

이렇게 냉정한 이야기를 이토록 따뜻하게 전할 수 있을까. 못 이룬 사랑, 부서진 꿈, 찾을 길 없는 희망을 보여주며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쓸쓸하게, 그러나 진심을 다해.

'바냐 아저씨'가 펼쳐 보이는 인생의 진경(眞景), 그 한가운데에 서있는 배우가 백성희(88)다. 바냐의 어머니 마리야로 출연하는 백씨는 바냐를 괴롭히는 고통의 두 축 중 하나다. 마리야는 교수 사위만 떠받들고, 노동하는 아들 바냐를 무시한다. 괴로운 현실에 번민하던 주인공 바냐가 총을 꺼내 드는 아수라장에서도 먼 곳을 응시하는 백씨의 시선은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체호프의 속삭임을 조용히 웅변한다.

연극‘바냐 아저씨’에서 바냐의 어머니 마리야로 출연하는 백성희씨는“내‘값’을 하려고 무대에 오른다”고 말했다. /주완중 기자
연극‘바냐 아저씨’에서 바냐의 어머니 마리야로 출연하는 백성희씨는“내‘값’을 하려고 무대에 오른다”고 말했다. /주완중 기자
연극‘바냐 아저씨’가 펼쳐보이는 인생의 진경(眞境), 그 한가운데에 선 배우가 백성희(88). 있는 듯 없는 듯 확실히 있고, 보일 듯 안 보일 듯 똑똑히 보여주는 88세 노배우는 “배우의 ‘값’을 해야 하니 무대에 선다”고 말했다. “육신이 뻑뻑해요. 그래도 저 자신을 시험 중이에요. 이걸 계속할 수 있는지. 어쨌든 제가 현역이잖아요. 국립극단의 유일한 단원이니까. 단원 값, 배우 값을 해야죠.”/주완중 기자
대사는 많지 않다. 동작이라고 해야 "아, 잊어버렸다"며 일어서거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두 마디 훈계를 던지는 정도다. 그 짧은 대사, 적은 동작으로 삶에 포박당한 바냐의 고통을 돋을새김해야 한다. 연출가 이성열은 "그래서 백성희 선생님을 모셨다"고 했다. "2004년 국립극단의 '바냐 아저씨'에서 백 선생님의 마리야를 봤다. 아, 정말 멋있었다." 이성열은 그 느낌을 한마디로 "배우의 존재감"이라고 표현했다.

있는 듯 없는 듯 확실히 있고, 보일 듯 안 보일 듯 똑똑히 보여주는 88세 노배우는 "배우의 '값'을 해야 하니 무대에 선다"고 말했다. "육신이 뻑뻑해요. 그래도 저 자신을 시험 중이에요. 이걸 계속할 수 있는지. 어쨌든 제가 현역이잖아요. 국립극단의 유일한 단원이니까. 단원 값, 배우 값을 해야죠." '한국 연극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면서도 "아직 못다 한 값이 있다"는 말이었다. 거동이 불편할 나이지만 오히려 "무대가 진통제"라고 했다. "관객 호응이 짱짱하게 나올 때 모든 고통을 잊어요. 무대에 나가면 편해져요. 신기해."

마리야는 작은 역할이라서 더 어렵다. "잘못하면 노인네 하나가 중얼중얼하다 끝나버리게 되거든. 자기가 작품을 딱 쥐고 있어야 해. 무대 전체의 톤을 만들어야지. 무대의 맥과 호흡을 조절한다는 사명감, 내 소임을 다한다는 책임감, 그 생각에 살아요, 무대에서."

백성희는 "체호프는 인생을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공감이 간다"고 말했다. "어차피 인생은 무언가를 짝사랑하며 살다 가는 거 아닌가.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배우는 무대를, 그리고 인생 자체를."

나이 드니 대사를 외우는 것도 힘에 부칠 법하다. 그러나 "대사가 날 가져다 쓰는 거지, 내가 대사를 쓰는 게 아니라 문제없다"고 했다. "예전 뇌졸중 때문에 후유증 생길까 걱정했는데 전혀 탈이 없어요. 목소리도 다행히 그대로 나오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운명인가봐."

▷연극 '바냐 아저씨' 24일까지 명동예술극장,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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