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단테의 신곡', 길잡이 베르길리우스役 정동환]
연출은 14년지기 한태숙이 맡아…
그와 작업하면 아주 고단하지만 고통으로 빚을 때 작품은 더 빛나
배우 정동환(64)은 요즘 '지옥'에서 산다. "집에서도 지옥, 연습장에 나와도 지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걸 안 했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싶다"고 말했다. 옆에서 배우 박정자도 거들었다. "지옥이 정말 좋다. 천국 가기를 기다리는 연옥보다 백배 낫지 않으냐."
지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좋다"는 '특별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연극이 2일 개막하는 '단테의 신곡(神曲)'이다. 정동환은 단테(지현준)의 길잡이인 시인 베르길리우스로, 박정자는 시동생과 '애욕'에 빠진 프란체스카로 나온다. 연출은 어느 작품에서나 혹독한 훈련으로 '지옥'을 보여주는 한태숙이 맡았다. '신곡'이 정식 무대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 모두가 그 이름을 들어는 봤으나,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고전'이다.
최근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만난 정동환은 "한태숙 연출과 작업하면 참으로 고단하다"고 말했다. "보통 연극 10편분의 에너지와 시간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안 하면 궁금해서 미친다." 한 마디로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그 정도 고통 없이 제대로 된 연극이 나올 수 있겠느냐"며 "고통으로 빚어내야 빛이 나니까 이를 악물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9년 연극 '낯선 사나이'(연출 유덕형)로 데뷔했다. 집중과 에너지라면 그를 따라오는 배우를 찾기 어렵다. 2008년 나이 예순에 연극 '고곤의 선물'에 전라(全裸)로 출연하며 "나는 벗을 테니, 니들이 알아서 가려라"고 선언해 후배들이 절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 열연으로 이듬해 이해랑연극상을 받았다. 대표작 중 하나인 '레이디 맥베스'는 '연극 동지' 한태숙과 14년 인연의 시작이기도 했다. "1998년 초연 때 반해 제가 물었어요. '늙었다고 날 안 써주는 거냐'고. 그다음 공연 때부터 같이했죠."
'배장화 배홍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등 공동 작업이 많았으나, 이번 '신곡'은 유난히 특별하다고 말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실존 인물"이라며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면 안 된다는 한태숙과 "어느 정도 극화해 인간적인 면모를 살려야 한다"는 정동환의 팽팽한 대결이었다. "제가 언성을 높이니까 한태숙씨가 '저 사람하고 십몇년을 같이 일했는데, 저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다고 그랬대요." 누군가에게 들은 말을 전하던 정동환은 "제가 화를 낸 게 아니고 단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소상한 설명에 귀를 기울고 있자니, 14년 부부의 사랑싸움 전말을 듣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만큼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존중하고, 조심하는 사이다. 정동환은 "연출자하고 싸워서 배우가 이기면 큰일 난다"고 말했다. "배우의 해석만 고집하면 새로운 인물을 못 만난다. 자기만의 인물밖에 못 만든다. 그러려면 배우 하지 말아야지."
'신곡' 중 그의 가슴을 울린 장면이 있다. 베르길리우스가 지옥 마귀들에게 호통을 치며 "이 거룩하고 비밀스러운 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외치는 부분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거룩하고 비밀스러운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얘기 아닐까요." 그 '길'이 정동환에게는 연극이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정말 행복하다"였다.
▷연극 '단테의 신곡' 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2280-4114~6
☞신곡(神曲)
단테 알리기에(1265~1321)가 지옥과 연옥, 천국을 일주일간 순례하며 보고 들은 사연을 1만4233행에 묘사한 서사시. 지옥, 연옥, 천국 편은 각각 33편, 지옥에 포함된 서곡을 포함해 총 100편으로 구성됐다. 모든 행이 11음절이며, 각운까지 맞춰 형식적으로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