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사라지면 삶도 끝나는 걸까

입력 : 2013.04.12 03:03   |   수정 : 2013.04.12 09:14

[연출 임영웅·주연 손숙… 연극 '나의 황홀한 실종기' 12일 개막]
알츠하이머 걸린 여든의 여인, 쓸쓸한 삶의 마지막 그린 작품

남편은 가방 하나만 들고 다른 여자에게로 가버렸다. 마지막 선물은 돌아선 등짝이었다. 바윗덩이처럼 차고 단단한 그 등에 칼을 꽂고 싶었던 여자는 묵묵히 세월을 견디다 여든이 됐다. 외로운 삶의 끝자락, 윤금숙을 찾아온 것은 알츠하이머였다. 오래전 병으로 잃은 네 살배기 자식의 꿈을 꾼 윤금숙은 베개를 끌어안고 거리로 나선다.

79세 불문학자 오증자씨가 생애 처음으로 쓴 극본을 바탕으로, 칠순의 연출가가 지휘하고, 데뷔 50주년을 맞은 배우가 출연하는 '우리 연극계에 근래 찾아보기 힘든 명장(名匠)들의 합작품'(연극평론가 유민영)이 12일 개막한다.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산울림소극장에서 연극 &#44456나의 황홀한 실종기&#44457를 연습 중인 배우 손숙(왼쪽)씨와 작품을 지도 중인 연출가 임영웅씨. /이태경 기자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산울림소극장에서 연극 궨나의 황홀한 실종기궩를 연습 중인 배우 손숙(왼쪽)씨와 작품을 지도 중인 연출가 임영웅씨. /이태경 기자
끝없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듯 알츠하이머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연극 '나의 황홀한 실종기'.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4층에서는 개막을 앞두고 마지막 연습이 한창이었다./이태경 기자
알츠하이머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연극 '나의 황홀한 실종기'.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4층에서는 개막을 앞두고 마지막 연습이 한창이었다. "아기를 훔쳐갔어, 내 아기를. 그 사람이 훔쳐갔어!" 배우 손숙씨의 애끓는 목소리가 연습실을 울렸다. 그가 기억 속 툇마루, 햇빛, 봉숭아, 백일홍을 불러낼 때마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비밀이 드러난다. 작품에는 커다란 사건이나 반전은 없다. 주인공의 독백을 타고 지나온 세월과 심리가 차츰 드러난다.

희곡은 오증자씨가 요양원에서 보고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오씨는 "하루하루 소멸되는 인생, 이미 폐기된 인생이라고 치부되는 삶을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한 달여의 연습 기간 중 오씨는 한 번도 연습실에 들르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못 보겠다"며.

오씨의 희곡은 하마터면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연출가 임씨는 허리 이상으로 입원해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졌다. 배우 손씨는 '어머니' 공연을 마치자마자 병원에 실려갔다. 과로와 위궤양. 과연 가능할까 다들 염려할 때, 병석을 털고 임영웅씨가 한마디했다. "합시다." 손숙씨는 "선생님께 바치는 연극으로 여기고 무대에 선다"고 했다.

▷연극 '나의 황홀한 실종기', 12일~5월 2일,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02)334―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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