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소년' 500년 만의 첫 여성 지휘자, 지휘보다 어려웠던 건…

입력 : 2013.03.15 02:11

[빈 소년 합창단 첫 여성·한국인 지휘자 김보미씨]
사무직원까지 대부분 남자인 곳… 10~14세 단원들 25명 지도 맡아
"어린학생과 투닥대며 많이 배웠죠"

빈 소년 합창단은 이름이 암시하듯, 오랫동안 '금녀 구역'이었다. 사춘기 미만의 소년 단원과 지휘자는 물론 사무직원까지 대부분 남성이었다. 지난해 9월 빈 소년 합창단의 모차르트 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 김보미(35)씨는 창단 이래 500년 만의 첫 여성 지휘자이며 동시에 최초의 한국인 지휘자다.

12일(현지 시각) 오스트리아 빈 소년 합창단의 학교이자 기숙사인 아우가르텐 궁전. '모차르트 반(Mozartchor)'이라는 팻말이 붙은 3층 방문을 열었더니 놀이방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누군가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젓가락 행진곡'을 마구 치면서 노래 불렀고, 스마트폰 전자오락에 빠져 있는 한 소년은 누가 방문을 열었는지도 몰랐다.

검은 뿔테 안경을 낀 김보미 지휘자가 피아노 앞에 앉자,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들은 지휘자의 피아노에 맞춰 10여분간 목청을 가다듬었다. 우리가 익히 알던 '천상의 목소리'였다.

오스트리아 빈 아우가르텐 궁전의 합창단 연습실에서 노래하고 있는 지휘자 김보미(가운데)씨와 빈 소년 합창단의 모차르트 반 단원들. 김씨는 이 합창단의 첫 한국인 지휘자이자 첫 여성 지휘자다. /빈=김성현 기자
오스트리아 빈 아우가르텐 궁전의 합창단 연습실에서 노래하고 있는 지휘자 김보미(가운데)씨와 빈 소년 합창단의 모차르트 반 단원들. 김씨는 이 합창단의 첫 한국인 지휘자이자 첫 여성 지휘자다. /빈=김성현 기자
"여기선 끊어 부르지 말고 레가토(legato·부드럽게 이어서)로 부르세요." 멘델스존과 슈베르트의 성가를 지도하며 김씨는 연방 손뼉을 치거나 바닥을 발로 밟으면서 박자를 맞췄다. 모차르트 반의 소년 25명은 한 시간 동안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의 주제가까지 세 곡을 연습했다. 10~14세 소년 100여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은 모차르트·하이든·슈베르트·브루크너 4개 반으로 나뉘어 활동한다.

김보미씨가 빈 소년 합창단에서 지휘자를 공모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난 8월. 지도교수가 추천서를 써주며 "가보라"고 권했다. 연세대 교회음악과와 독일 레겐스부르크 음대를 마친 김씨는 빈 국립 음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지휘자 오디션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처음엔 초견(初見) 피아노 연주(처음 보는 악보를 연주하는 것), 이어 1주일간 합숙 연습.

김씨는 "미혼, 외국인, 여성…. 모두 소년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어서 처음엔 긴장했다"고 했다. 합창단은 결국 파격을 선택했다. 오디션 한 달 후 그는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김씨는 "뭘 하더라도 튀어 보이는 핸디캡은 반대로 잘만 하면 두 배로 돋보일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기록을 새로 쓰는 사람다운 말이었다.

취임 후엔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공연 날 점잖은 검은색 양말이 원칙이라는 걸 잊고 있다가, 연주회 30분 전에야 흰 양말을 신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 아이를 맨발에 구두 차림으로 무대에 세웠다. 지금은 배탈·고열 등 아이들 병치레에 대비해 '예비 후보'를 준비할 만큼 용의주도해졌다.

김씨는 악보를 분실한 아이에게 지휘자 악보를 빌려줬다가 돌려받는 걸 깜빡 잊고 그대로 무대에 올라간 적이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암보(暗譜)로 겨우 연주를 마쳤다. 김씨에게 소년이 다가와서 말했다. "그럴 땐 솔직하게 관객들에게 악보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고 말하는 편이 좋아요." 김씨는 "아이들에게 배우면서 실수를 고친다"며 활짝 웃었다.

빈 소년 합창단은

왕실 미사에서 노래할 소년 단원을 확보하라는 1498년 합스부르크 왕가 막시밀리안 1세의 칙령으로 만들어졌다. 작곡가 슈베르트가 유년 시절 합창단 단원으로 노래했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브루크너는 이 합창단을 위한 곡을 만들었다. 선원을 연상케 하는 푸른색 단복을 입고, 빈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를 비롯, 매년 300회의 공연으로 50만명 관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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