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 포화상태, 탈출구는 '아침 삼겹살'

입력 : 2013.03.04 03:03   |   수정 : 2013.03.04 09:12

[14] 뮤지컬 배우 정성화
―아내와 월요일 아침에 삼겹살 먹기
무대 위 '완벽' 향해 뛰다보면 책임·긴장감으로 질식 직전, 그럴 땐 함께 먹는 음식이 '약'
'똥국' 끓이던 취사병 시절 제 요리에 행복해하는 장병들 보며 깨달았죠

배우는 얄궂은 직업이다. 행복해도 행복하지 않은 척, 불행해도 불행하지 않은 척 보여야 한다. 특히 연극이나 뮤지컬 배우는 반복되는 공연에서도 매일매일 100퍼센트를 보여줘야 한다. 억눌리거나 질식하기 쉽다. 한마디로 배우는 불행해지기 쉬운 존재다. 그래서 한 번쯤은 자신을 '놓아버리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게 내게는 음식이다. 그중 최고는 아내와 월요일 아침에 구워먹는 삼겹살이다.

지난해 11월부터 한국어 라이선스로는 국내 초연인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으로 무대에 선다. 지방 공연 때문에 올해 1월 1일을 대구에서 혼자 맞았다. 가족 없는 명절은 무섭다. 1일 눈을 뜨자마자 한 결심은 '먹자!'였다. 동료 배우 5명이 뭉쳤다. 경북대 후문에서 쌀국수를 시켰다. 여럿이 먹으니 맛이 기가 막혔다. 쌀국수가 소화되기도 전에 피자를 먹고, 저녁에는 갈비찜을 먹었다. 가족을 만날 수 없던 다섯 남자의 설날 음식 대첩은 감자탕집에서 끝났다.

함께 먹는다는 게 외로움을 지우는 방법이란 걸 안 것은 군대였다. 1996년 군대에 가니 "넌 밥이나 해라"는 명이 떨어졌다. 6개월간 혼자서 18명의 끼니를 책임지는 취사병을 했다. 군대 레시피라는 게 별거 없다. 정해진 분량을 취사도구에 정확히 '투하'하면 된다. 처음엔 영창에 갈 뻔한 적도 있다. 1시에 먹을 식사를 2시 30분에야 차렸던 것이다. 취사병에게 가장 행복한 반찬은 '똥국'. 민간인들이 된장찌개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자주 나와서 지겹고, 색깔이 그래서 군인들이 붙인 별칭이지만, 만드는 입장에서는 고맙다. 물 붓고 멸치 한 줌 넣고 감자 썰어 넣고 두부·양파에 된장 넣으면 끝이다.

취사병 때는 요리하면서 행복이고 뭐고 느낄 겨를이 없었다. 차려내기만 하면 됐다. 그러다 슬슬 욕심이 생겼다. 이왕이면 맛있는 거 해줘야지. 건빵을 그대로 내놓지 않고 기름에 살짝 튀겨 설탕에 묻혀주는 잔재주를 부려봤다.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미하게 깨달았다. 같이 먹는다는 게 가장 행복하고, 인간적인 대화라는 것을.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나를 유달리 '갈구던' 선임병이 "오늘 맛있었다"고 한마디 했을 때였다. 나보다 나이도 한참 어렸는데.


서울 종로구의 한 삼겹살 전문점에서 만난 정성화는 "함께 나눠 먹는 이 순간의 진공 상태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취사병 출신인 그가 가장 자신 있는 요리는 닭볶음탕. /이태경 기자
서울 종로구의 한 삼겹살 전문점에서 만난 정성화는 "함께 나눠 먹는 이 순간의 진공 상태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취사병 출신인 그가 가장 자신 있는 요리는 닭볶음탕. /이태경 기자
그저 맛있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2000년 무렵 일산에서 혼자 살며 이런저런 요리를 시도할 때였다. 만두를 수십 개 빚어 쪄놓고, 친구들을 불렀다. 한 녀석도 올 수가 없다고 했다. 바쁘다, 여행 갔다, 선약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만두를 혼자 먹는데 눈물이 났다. 맛은 있었지만, 맛있지가 않았다. 음식은 나누니까 즐겁고 행복한 거란 걸 그때만큼 절감한 적은 없다.

배우의 책임과 긴장을 알게 된 아내가 인도한 맛의 세계는 '월요일 오전의 삼겹살'이다. 월요일은 대부분 공연이 쉰다. 전날 밤까지 시속 300㎞로 질주하던 차가 갑자기 시동이 꺼진 느낌이다. 늦잠에서 깨어나면, 달궈진 불판의 열기가 아파트에 가득하다. 아내가 삼겹살을 밥 위에 얹어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단, 반드시 소주가 있어야 한다. 그보다 맛있는 음식, 행복한 순간은 세상에 없다. 이렇게 나를 풀어주는 순간이 있다는 것, 숨 쉴 구멍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하는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지극한 행복이라는 진공의 순간을 안겨준다.

음식과 공연은 비슷한 게 있다.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 해도, 어느 날은 그 맛이 안 날 때가 있다. 차이는 타율이다. 10타수 9안타는 되어야겠지.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내달 서울로 올라간다. 목표는 10타수 10안타다. 배우는 매일 공연하지만, 관객에게는 그날 그 공연뿐일 테니까.

☞정성화

배우 정성화(38)는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1994년 SBS 공채 개그맨이 됐다. ‘아이 러브 유’(2004)로 뮤지컬 데뷔할 때만 해도 ‘연기 좀 하는 개그맨’이었다. 그가 대형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2007)에서 주인공 돈키호테에 조승우와 더블 캐스팅된 것은 ‘사건’이었다. 2009년 뮤지컬 ‘영웅’, 지난해 ‘라카지’로 단연 한국 최고급 뮤지컬 배우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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