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내 사랑, 이 악단과 벌써 3000번째 호흡

입력 : 2013.01.02 23:53

[신년음악회 앞두고 내한… 이스라엘 필 지휘자 주빈 메타]
내 악단과 이스라엘·아랍 학생들 함께하는 무대 보는 게 꿈이에요
아시아 연주자들 실력 좋지만 음악적 성숙엔 시간이 필요하죠

지휘자 주빈 메타(77)를 만나러 중국 광저우(廣州)에 간 날 오후 내내 가랑비가 내렸다. 주빈 메타가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하자 공연 관계자들이 우산을 들고 뛰어나갔다. 메타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폭우의 나라 인도 출신이란 걸 잊었소?"

지난 12월 27일에 있었던 인터뷰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아시아 투어를 앞두고 열린 자리. 그가 현장에서 보여준 숫자에 대한 기억력은 탁월했다.

"1961년 지휘자 유진 오먼디가 이스라엘 필하모닉 콘서트를 앞두고 급작스럽게 취소했죠. 빈에서 지휘 공부를 하고 있던 내게 '대타로 서달라'는 전보가 왔지. 25세의 인도 유학생에게 별다른 일이 있었겠소? 그때 나와 악단의 '첫사랑'이 시작된 거요. 1969년엔 음악감독이 됐고, 1981년에는 '평생 음악감독'으로 지명됐지. 2011년으로 반세기를 맞았소. 이스라엘 필은 매주 7차례 연주하기 때문에 3주만 머물러도 20여 회는 연주하는 셈이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이 악단과만 연주 횟수가 3000회를 넘을 거요."

지휘자 주빈 메타는“리허설과 음악회는 용암처럼 끊이지 않고 날마다 계속된다. 거짓말로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어도 영원할 수는 없다. 지휘자가 단원들 앞에 설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정직’”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필 제공
지휘자 주빈 메타는“리허설과 음악회는 용암처럼 끊이지 않고 날마다 계속된다. 거짓말로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어도 영원할 수는 없다. 지휘자가 단원들 앞에 설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정직’”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필 제공
빈 유학 시절에 함께 공부했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먼·핀커스 주커만까지 청년 시절부터 메타의 곁에는 유대계 음악가들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친(親)이스라엘 음악인'으로 분류되지만, 3년 전부터 그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아랍 학생 250명이 클래식 음악을 함께 공부하는 학교를 2009년 이스라엘 북부에 세웠어요. 학교 이름은 히브리어로 '변화'라는 뜻의 '미프네(Mifneh)'죠. 이스라엘 필 단원들도 매달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지도해요. 먼 훗날 이스라엘과 아랍 학생들이 이스라엘 필에 나란히 앉아서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내 꿈이라오."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난 메타는 24세에 캐나다 몬트리올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지명된 이후 LA 필하모닉과 뉴욕 필, 독일 바이에른 오페라 극장과 스페인 발렌시아 오페라 극장 등 전 세계 극장과 오케스트라에서 경력을 쌓았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베토벤을 지휘할 때는 인도인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는다. 물론 대여섯 시간에 이르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지휘할 때는 인도식 요가가 도움을 주지만…(웃음)"이라고 했다.

1935년 뭄바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던 아버지 멜리 메타(1908~2002)의 지대한 영향을 그는 받았다. 항공기가 대중화되기 이전인 1920년대 유럽 교향악단과 연주자들은 중국이나 일본 공연을 가면서 꼭 인도에서 한 번 쉬었다.

"아버지는 인도에서 이 연주회들을 보면서 클래식 음악에 매혹됐고, 거의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공부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죠. 뭄바이 심포니는 프로와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절반씩 섞여 있어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도 어릴 적부터 포스터를 붙이고 리허설을 보면서 클래식 음악에 둘러싸여서 살았죠."

여덟 살 꼬마 사라 장(장영주)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들려주는 소리"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음악적 후견인도 메타였다. 최근 그의 관심은 다시 아시아로 향한다. "중국은 랑랑과 유자왕(피아노)까지 독주자의 활약이 두드러지지요. 한국은 훌륭한 지휘자들을 갖고 있고요. 아시아 연주자들의 실력은 유럽이 부러워할 만한 수준이지만, 음악적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앞으로 아시아에서 더 많은 지휘자와 훌륭한 오케스트라들이 쏟아질 거예요."

어느새 희수(喜壽·77세)를 맞았지만, 여전히 그는 2~3년씩 앞서 스케줄을 짜고 있다. "2015년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플라시도 도밍고(테너)와 오페라를 할 계획이에요. 우리가 먼저 맡아놓지 않으면 훌륭한 성악가들을 누가 먼저 낚아챌지도 모르니까."

"가끔은 다음 날 일정이 잡혀 있지 않은 삶이 부럽다"는 그의 말에 불현듯 시샘이 일었다.

▷이스라엘 필하모닉(지휘 주빈 메타) 내한 공연, 1월 5~6일 예술의전당, (02)580-1300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