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희곡상]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바치는 위로의 굿 한판

입력 : 2012.11.14 23:18

[제6회 차범석희곡상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 김동기씨]
간성 혼수 아버지 "굿 해달라" 부탁, 연극으로 대신 올려 드리려고 집필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 했던 연극… 돌아보니 역시 '나의 여인'이더라

올해로 6회째를 맞은 차범석희곡상은 장막 희곡과 뮤지컬 극본 심사를 각각 예심과 본심으로 나누고 심사위원을 한 명씩 늘렸다. 희곡 예심 심사는 극작가 김명화, 배삼식씨가, 본심은 연출가 임영웅, 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예심 위원들과 함께 진행해 김동기의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윤호진 에이콤 인터내셔날 대표, 김철리 서울시극단 단장,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연출가 최용훈씨가 심사한 뮤지컬 극본 부문에는 당선작이 없었다. 올해 응모작은 장막희곡 부문 78편, 뮤지컬 극본 부문에 50편이 접수돼 예년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아…." 당선 소식을 들은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탄식하듯 감탄사를 뱉고서 나온 첫 마디는 "그만두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고 고독했는데…"였다.

극작가 김동기(44), 출발은 좋았다. 1996년 처음 쓴 희곡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두 번째 희곡은 국립극장 공모에 뽑혔다. 2005년 첫 희곡집을 낼 때까지 10곳에서 당선되거나 선정됐다. 영화감독이 만나자고 전화 오고, 방송국 PD가 얼굴 좀 보자고 찾아왔다.

기세를 몰아 오랜 꿈이던 극단을 차린 것이 2006년이었다. 이제부터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의 발판일 줄 알았던 극단은 현실의 덫이 됐다.

한 달 대관료 2600만원인 극장을 호기롭게 6개월이나 빌렸다. 계약금으로 5400만원을 내고 첫 작품을 올렸으나, 한 달 만에 내려야 했다. 그가 보기에도 수준 미달이었다. "세 작품 올리고 3년 만에 망했어요. 빚만 억대로 남았죠. 작가는 벌이가 안 돼도 재미가 있는데, 제작을 하려니 남의 돈 끌어오는 게 큰일이었어요. 사람이 저도 모르게 변하더군요."

극단을 접은 후 3년간 희곡이라곤 한 편도 못 썼다. "작가가 한창 뜨거워야 할 나이가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인데 그 시기를 극단 한다고 다 보낸 거죠. 정신 차려 보니 마흔넷이었고요. 교훈만 하나 얻었습니다. 작가로서 제 직분에 충실하라는."

당선작 '아버지와…'는 자전적 이야기다. 1남 2녀 중 막내이자 외아들인 그는 아버지와 유달리 각별했다. 그러나 지원했던 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연극의 길을 택한 그를 부친은 한동안 보려 하지 않았다. 그 시대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딴따라는 안 된다'던 부친은 그의 희곡이 세상의 인정을 받으면서 마음을 돌렸다. "내가 무식해서 몰랐다. 네가 많이 헤아려다오"라며 클 광(侊), 헤아릴 탁(度)을 쓴 이름 '광탁'을 지어줬다. 그가 현재 쓰는 필명이다.


 

아버지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로 제6회 차범석희곡상에 당선된 김동기씨는“상 받았다고 이렇게 좋아해도 되나 싶어서 쑥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6일 중구 덕수궁 돌담길에서. /이명원 기자
아버지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로 제6회 차범석희곡상에 당선된 김동기씨는“상 받았다고 이렇게 좋아해도 되나 싶어서 쑥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6일 중구 덕수궁 돌담길에서. /이명원 기자

작품 속에서처럼, 일흔다섯이던 그의 부친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여름이었다. "간성 혼수로 정신이 혼미한 아버지께서 '굿을 해달라'고 하셨어요. 충격이었습니다. 극작가는 연극이라는 굿을 하는 굿쟁이인데, 제가 굿을 안 하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편찮으신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아버지께 굿 한판, 연극 한 편 올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한달음에 썼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시작했지만, 쓰다 보니 우리 시대 아버지를 모두 위로하는 굿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고 한다. 작품 중 아들이 아버지 배를 어루만지면서 "이제 배 안 아프죠?"라고 묻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바로 그 한순간을 위해 쓴 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우리 시대 아버지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움이 덕지덕지 붙은 곳이 있어도 가고 싶다고 하지 않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죠. 그렇게 누르고 참다 보면 모든 게 너무 늦어버린 순간이 오고요." 추억이 떠올라, 초고(草稿)에는 감정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 있었다. "쥐어짜고 슬픈 대사가 많아 걷어내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이번 수상은 그에게 '연극이라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줬다고 했다. "대학 입학 무렵에 그녀, 연극과 미칠 듯이 사랑에 빠졌죠. 드라마라는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일방적인 호기심이었어요. 이제는 그녀에 대해 실망할 거 다 하고, 알 거 다 알게 됐죠. 드라마나 영화 같은 다른 여인도 눈에 들어와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남는 그 무엇' 때문에 끝내 연극이 제 사랑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랑 아닐까요? 이 사랑을 바탕으로 더욱 성숙한 연극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선작 '아버지와…' 는]

아버지는 떠났다, 숨겨왔던 진심을 남기고


함경도가 고향인 아버지는 17세에 월남해 악착같이 가족을 부양했다. 일흔여덟이 된 아버지는 어느 날 간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의사는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보고 싶은 사람 다 만나라'며 돌려보낸다.

작중 화자인 차남(次男)은 삼류 연극배우. 장남만 중시하는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고 가출했던 차남.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돌아와 간성 혼수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아버지를 돌본다. 아버지는 한 달 만에 세상을 뜨고, 가족들 앞에 감춰졌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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