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치기 출연,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입력 : 2012.09.03 03:06   |   수정 : 2012.09.03 10:25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주인공 맡은 류정한]
불혹에 찾아온 우울증, 안 한다던 TV에 겹치기까지…
저라도 욕했을 것 같아요… 일만이 유일한 돌파구였죠
내 구원이 된 작품 '두 도시…' 주인공처럼 사랑하고 싶네요

배우 류정한(41)은 데뷔 이후 줄곧 '왕자'였다.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97)로 데뷔한 그는 '오페라의 유령', '지킬앤하이드', '맨오브라만차' 등 대작 뮤지컬 초연으로 잇단 흥행 성공을 끌어내며 뮤지컬 대표 스타로 우뚝 섰다. 소극장 초연이었던 '쓰릴미'로는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2007)을 받았다. 늘 '고급스러운 목소리' '명품 카리스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상 신호가 느껴진 것은 올해 초부터였다. '엘리자벳'의 '죽음' 역으로 나온 그를 보고 일부에서 '슬럼프 아니냐'고 쑥덕거렸다. 설상가상 TV 드라마 출연 사실을 밝히면서 팬들의 융단 폭격이 시작됐다. 평소 "뮤지컬만 하겠다"고 누누이 공언해온 데다 "겹치기 출연하면 안 된다"고 했던 그가 '엘리자벳'과 동시에 드라마 촬영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배신자' '변절자'라는 팬들의 반발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4월 방영된 드라마에서도 "연기가 어색하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뮤지컬‘두 도시 이야기’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 대신 단두대에 오르는 주인공을 맡은 류정한은“따뜻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그녀의 가족 전체를 위해 선택한 희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뮤지컬‘두 도시 이야기’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 대신 단두대에 오르는 주인공을 맡은 류정한은“따뜻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그녀의 가족 전체를 위해 선택한 희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뮤지컬‘두 도시 이야기’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 대신 단두대에 오르는 주인공을 맡은 류정한은“따뜻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그녀의 가족 전체를 위해 선택한 희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내내 침묵했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난 30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흔들리게 됐다"며 "우울증의 유일한 돌파구가 나 자신을 혹사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우울증 이기려 나를 혹사시켜"

류정한은 "우울증 치료 사실은 식구들도 모른다"고 했다. 데뷔 이후 15년간, 비교적 굴곡 없던 그에게 우울증이 닥친 것은 '엘리자벳' 공연 중일 때였다. 흥행도 쾌조였고,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지금은 헤어졌다)와 연애도 잘됐다. 우울할 이유가 없었다. "견딜 수 없게 힘들었어요. 이러다가는 모든 것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죠."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의사는 우울증 중에서도 매우 위험한 '이유 없는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 무렵 드라마 제안이 들어왔다. 안 하려고 했는데 "잡생각이 한시라도 파고들지 않는 게 좋으니, 해보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다. 직후에 드라마를 만드는 황인뢰(58) 감독을 만났다. 류정한은 "황 감독을 보니 고 1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생각나서 맡았다"고 말했다.

"팬들이 욕한 거 당연합니다. 하면 안 된다고 한 거 한꺼번에 다 했으니까요. 안 하겠다던 드라마에, 하면 안 된다던 겹치기에. 저라도 욕했을 거예요. 하지만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뮤지컬과 드라마 촬영을 병행하면서, 두 가지 생각만 했다고 한다. "자, 이제 먹어야지." "자, 이제 자야지."

혹독하게 몰아붙여 가며 몇 달을 자신과 싸웠다. 그는 "이제는 괜찮다"고 했다. "드라마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정신없이 시간을 통과하는 법을 배우며 고비를 넘긴 것 같습니다."

◇"두 도시 이야기, 구원이 된 작품"

다시 자신을 찾은 그가 선택한 작품이 지난달 28일 개막한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다. 문호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서, 류정한은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 대신 단두대에 오르는 순정한 주인공 시드니 칼튼으로 나온다.

'두 도시 이야기' 중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의 시드니 칼튼. /BOM코리아 제공
'두 도시 이야기' 중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의 시드니 칼튼. /BOM코리아 제공

그는 "'두 도시 이야기'는 제게 구원과 같은 작품"이라며 "(인터뷰 하루 전인) 29일 공연 중에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했다. "수천 번 받아본 박수였는데, 처음 받아본 듯 특별하고 소중했어요. 관객의 사랑이 이렇게 고마운 거구나,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는 30일 공연에서도 애절한 음성과 연기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시드니는 단두대에 오르면서 "가장 평온한 안식처로 간다"고 말한다. 류정한도 "이제는 저의 안식처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 스케줄은 뮤지컬 위주로 짜려고 해요. 저도 시드니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던 기자에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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