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으면 더 멋진, 우리는 자매

입력 : 2012.08.08 16:32

정명화·정경화

형제자매가 한길을 걷는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커리어에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한 무한 신뢰를 바탕으로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도 있다. 대관령국제음악제 공동 예술감독을 맡은 정명화·정경화 자매는 “우리는 서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이”라고 말한다. 자매는 나이 들어가는 모습까지도 정답다.

“어휴~ 녹화를 다섯 시간이나 했어요.”
정명화·정경화 자매의 첫 예능 프로그램 녹화 소감이다. 자매는 지난 7월 17일에 방송된 KBS <승승장구>에 출연해 ‘신동’으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던 시절부터 최고의 매니저였던 어머니,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귀한 악기 이야기 등을 풀어놓았다.

“그동안 시청자 입장에서 <승승장구>를 봐왔는데, 이날은 평소와는 다르게 MC들이 저희를 조심스러워하더라고요. 보통 때는 게스트에게 곤란한 질문도 던지던데.(웃음) 아마 혼자 출연했으면 그 긴 시간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아무래도 둘이 있으니까 편했죠.”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로 무대에만 서왔던 이들이, 이날만큼은 친근한 모습을 보여줬다. 정명화는 MC들의 짓궂은 돌발 제안에 부응해 트위스트 스텝을 보여줬는가 하면, 정경화는 “배우가 정말 예뻐서 <옥탑방 왕세자>를 열심히 봤다”며 박유천 이모팬을 자처했다.

또한 이들은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를 꺼내 보여줬다. 심지어 정경화는 MC로 출연한 임시완에게 연주해보라며 선뜻 건네줬고, 자신도 즉석에서 ‘사랑의 인사’를 연주해보였다. “악기는 신체의 일부”라며, 누군가 손만 대어도 안절부절 못하는 이들이었다.

“임시완 씨가 바이올린을 제대로 연주하더군요. 어렸을 때 하다가 그만뒀다고 하는데,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저희가 많이 예뻐했죠. 기분이 좋아서인지 동생이 즉흥적으로 연주했어요. 그런 경우는 지금껏 거의 없었거든요.”

동생, 남편까지 합심해 마련한 서머 페스티벌

자매가 나란히 방송에 출연한 건 20여 년 만이다. 그동안 동생은 미국에, 언니는 한국에 있었다. 정경화는 미국 줄리어드음악원의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며 연주활동을 해왔고, 정명화는 1994년 귀국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연주자로 활동해왔다. 젊은 시절에는 막내 동생인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정명훈과 함께 삼남매가 피아노 트리오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1~2년에 한 번씩 이벤트성으로 무대에 설 뿐이다.

그런 이들이 나란히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인터뷰에도 나서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는 7월 27일에 개막되는 대관령국제음악제 때문이다. 자매는 지난해부터 이 축제의 공동 예술감독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단 2회를 제외하고 매년 참여해온 정명화는 축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강효 예술감독이 사임하면서 정명화·정경화 자매를 추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동생과 함께라서 용기를 냈어요. 음악제에 참여할 때마다 항상 동생을 떠올렸죠. 함께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역시 동생이 곁에 있으니, 부담 없이 의논할 수 있어서 좋아요. 저희끼리는 서로 완전히 믿을 수 있잖아요. 혹시 내 부족한 면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없이 의논할 수 있었죠. 싸움이요? 의견 다툼이 왜 없겠어요. 편하게 조율하고 맞춰가고 그랬죠.”

또 한 사람, 자매를 도와 음악제를 만들어가는 이가 있었다. 정명화의 남편 구삼열 월드임브레이스 회장이다.
“강효 선배의 경우는 전반적인 행정을 아내가 뒷받침해줬거든요. 그래서 저도 처음 예술감독직 제안을 받았을 때 남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어봤죠.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더군요. 예술감독으로서 할 일이 정말 무궁무진하게 많은데, 행정적인 부분은 남편이 도맡아 해줬어요.”

구삼열 회장은 현재 여수엑스포 UN 대표를 겸임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대관령국제음악제의 행정 일까지 맡게 됐다.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정명화는 “남편은 네 가지 역할은 거뜬히 해내는 사람”이라며 남편에 대한 무한 신뢰를 드러냈다.

자매의 노력 덕분에, 지난해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축제에 참석한 인원은 4만 명가량. 대부분의 공연이 일찌감치 매진됐고, 주변 숙박시설은 동이 났다. 평소 동생은 언니에게 “골치 아픈 일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해왔지만, 정명화는 “(몰랐는데) 근본적으로 이런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

“지난해 축제를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동이었어요. 손목 부상을 입었던 동생이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는 것부터, 매 공연이 감동이었죠. 저희가 머리를 맞대고 짠 프로그램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느꼈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기적이 일어난 공간, 대관령

정경화에게도 대관령국제음악제는 특별한 행사다. 축제의 예술감독을 맡은 지난해는 연주활동을 그만둔 지 6년 만에 극적으로 재기한 해였기 때문이다. 정경화는 2005년 9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부상을 입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키로프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에 협연자로 예정되어 있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손가락 부상으로 첫날 일정을 취소했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이틀 공연을 모두 취소할 수 없었던 그녀는 무리하게 무통주사를 맞고 무대에 섰다. 이후 통증은 돌이킬 수 없이 심해졌고, 결국 연주 활동을 접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 ‘바이올린의 여제’로 세계무대를 누비던 40년 동안 두어 번의 위기와 슬럼프를 겪어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연주자로 무대에 서는 대신 제자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0년 극적으로 무대에 섰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 때 이뤄진 연주였다. 그리고 지난해 정경화는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했다.

이 무대로 그녀는 완전한 재기에 성공했다. 부상당한 지 6년만이었다. 당시 정경화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이건 완전히 보너스다. 손가락 부상을 당한 뒤 다시 연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그간의 말할 수 없었던 고통을 드러냈다. 언니 정명화의 감격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온 식구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아주 말도 못했죠. 지난해 한국에 와서도 좋다는 건 다 해봤는걸요. 진료도 받고, 몸에 안 맞는 음식은 가려 먹고. 그래서 그런지 몸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정경화는 올해 초부터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녀의 열정만큼이나 청중의 반응도 뜨겁다.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도 정경화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중 ‘샤콘느’,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연주할 예정이다.

그리고 언니 정명화와 함께 브람스 ‘피아노 사중주 1번’을 함께 연주한다. 정명화도 무대에 선다. 드뷔시의 <첼로 소나타>를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함께 연주한다. 올해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이들의 연주만큼이나 기대가 되는 부분은 새로 완공된 뮤직텐트다.

“마침내 뮤직텐트가 첫선을 보이게 됐어요. 사방의 벽을 개방하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연주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지붕은 축음기의 나팔 모양이고, 벽을 투명한 유리로 만든 다목적 공연장이지요.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축제의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자매가 유난히 페스티벌에 애착을 갖는 것은 젊은 시절 세계 곳곳의 페스티벌을 다니며 행복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멋진 자연에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펼쳐진 페스티벌은 자매에게 아름다운 그림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릴 때부터 페스티벌에 많이 참여해왔어요. ‘정트리오’로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실내악이나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 같은 곡을 함께 연주하기도 했고요. 명훈이가 지휘하고, 저희 자매가 브람스 <이중 협주곡>을 협연하기도 했죠. 밤에는 턱시도를 입고 점잖게 무대에 서던 연주자들이 낮에 해변을 활보하거나 과자 사먹기 위해 줄을 서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 는 재미였어요.”

그리운 내 어머니

1 2004년 정트리오는 어머니 고 이원숙 여사의 86세 생일을 맞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어머니에게 바치는 음악회를 마련했다. 2 지난해 12월 정트리오는 ‘우리들의 어머니를 위하여’라는 콘서트를 통해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고 이원숙 여사를 추모했다.
1 2004년 정트리오는 어머니 고 이원숙 여사의 86세 생일을 맞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어머니에게 바치는 음악회를 마련했다. 2 지난해 12월 정트리오는 ‘우리들의 어머니를 위하여’라는 콘서트를 통해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고 이원숙 여사를 추모했다.
자매는 항상 어머니 생각을 한다. 어떤 일에든 ‘어머니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습관은 어릴 때부터 환갑을 넘긴 지금까지 한결같다. 이들의 어머니 고 이원숙 여사는 지난해 5월,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매일 어머니 생각을 해요. 어머니는 저희에게 최고의 매니저였어요. 몇십 년 앞을 내다보는 눈으로 저희 형제자매를 키우셨고, 음악인의 길로 이끄셨죠. 그래서 음악 관련 일에 대해 고민할 때면 언제나 어머니 생각부터 나요. 저희 자매가 함께 예술감독을 맡은 걸 아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대관령에 모시고 왔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고 이원숙 여사는 정트리오를 포함해 7남매를 성공적으로 키운 어머니로 유명하다. 이화여전 가사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사직에 몸담았던 그는 전쟁 직후 어려운 형편에도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의 재능에 맞춰 성공적으로 키워냈다. 전쟁 중에도 피아노를 싣고 부산까지 피난을 갔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 같은 특별한 자녀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통 큰 부모가 아이를 크게 키운다》, 《너의 꿈을 펼쳐라》 등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90년에는 세화음악장학재단을 설립해 음악인 양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새싹회 어머니상’, ‘국민훈장 석류장’, ‘자랑스런 이화인상’ 등을 수상하며 유명세를 탔다.

“어머니는 저희의 성향을 잘 파악하셔서 거기에 맞게 교육을 시키셨어요. 저희가 항상 ‘No’가 아닌 ‘Yes’라고 말하게끔 하셨죠. 저희가 무심코 하는 말도 그냥 흘려듣지 않으셨어요. 그런 것들로 저희의 성향을 파악하셨던 거예요. 절대 아이들끼리 비교하지도 않으셨어요. 저희 형제는 비정상적으로 어머니 말을 잘 들었는데, 그게 다 어머니의 능력이었던 것 같아요.”

자매는 입을 모아 어머니의 추진 능력을 칭송했다. 특히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 이민을 준비할 때 발휘한 능력은 지금 들어봐도 대단하다. 비자가 만료되어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이를 저지하는 6백 명의 서명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운영하던 식당에 항상 자녀들의 레코드를 틀어놓고 단골손님들에게 재능이 있는 아이들임을 각인시킨 덕분에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또 이원숙 여사는 누구보다도 배포가 컸다. 정경화가 1967년 레벤트리트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동문인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을 했을 때는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고급 옷가게에 데려가 옷을 열 벌이나 사줬다. 엄마의 파격적인 행동에 정경화가 깜짝 놀라자,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국제무대에서 우승한 사람이니, 옷을 잘 입어야 한다”한다며 격려했단다. 정경화가 슬럼프를 맞을 때마다 곁에서 다독이며 용기를 북돋아주던 이도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탁월한 매니지먼트 능력, 남매의 재능과 노력으로 정트리오는 1960~80년대 이슈의 중심에 있었다. 이들은 고 윤보선,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 만찬을 가졌고,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도 연주했다. 정명훈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는 카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했다. 이들의 행보는 요즘의 국가대표 스포츠 선수 이상으로 당시 국민들을 울고 웃게 했다.

“저희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자는 제의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음악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저희 역을 맡을 만한 배우들이 없었죠. 전쟁을 겪고 숱한 현대사를 거쳐왔으니, 이제는 영화로 제작되어도 충분히 흥미롭겠지요?”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두경아 기자 | 사진제공 대관령국제음악제,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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