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판화 수집벽, 예술적 재능… 모두 아버지의 유산

입력 : 2012.07.29 23:36

이항성 화백 아들 이승일 교수, 소장품 200여점으로 전시회

19세기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석판화 기술을 이용한‘해태 부적 판화’. /가나아트센터 제공
판화가인 아버지 옆에서 중학교 때부터 조수 노릇을 하던 소년은 대를 이어 판화가가 됐다. 직업뿐 아니라 '조선시대 판화 모으기'라는 아버지의 취미도 물려받았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木石으로 찍은 우리의 옛그림'(내달 5일까지)에 나온 조선시대 판화 200여점은 모두 이승일(66) 전(前) 홍익대 판화과 교수의 소장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판화 및 판(版) 1000여점과, 자신이 직접 수집한 1500여점 중 수작(秀作)을 엄선한 것이다. 이 교수의 부친은 광복 후 미술 교과서를 집필해 국내 미술 교육 분야를 개척하고 1958년엔 박수근·최영림 등과 함께 한국판화협회를 결성, 판화 보급에 힘썼던 고(故) 이항성(1919~1997) 화백이다.

"아버지는 판화협회를 창설하면서 우리 옛 판화에 눈을 돌리셨죠. 당시만 해도 너무 흔했기 때문에 불쏘시개, 화장실 휴지로 험하게 쓰이며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조선시대 판화의 가치를 재발견하셨던 거죠."

1970년대 초 이항성 화백이 도불(渡佛)하자 이 교수는 아버지 대신 '옛 판화 모으기'에 심취했다. 아버지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딱히 의무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좋았다. 장남인 그는 다섯 아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의 예술적 '피'를 물려받았다. 서울 인사동을 돌아다니고, 거간꾼들과 안면을 터서 모은 작품 중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건 이번 전시에도 나온 18세기 '국장도감의궤반차도(國葬都監儀軌班次圖)'. 가로 880㎝, 세로 49㎝ 종이에 왕실 장례 행렬을 기록한 작품이다. "30년 전 어느 골동품상이 가지고 왔는데 가격이 1000만원 정도 해서 당시로서는 부담이 컸죠. 귀한 작품이라 꼭 갖고 싶어서 겨우 돈을 구해 구입했습니다." 갖고 싶은 작품을 아깝게 놓친 경우도 있다. 근대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8~1933)의 죽도(竹圖) 목판이 한 예. "20년 전쯤에 문짝만 한 목판 10개를 한꺼번에 발견했는데, 너무 비싸 차마 살 엄두가 안 났어요."

이승일 교수가 전시장에서 보자기, 책 표지 등에 문양을 박는 데 쓰인 조선시대 능화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지호 객원기자 yaho@chosun.com
이승일 교수가 전시장에서 보자기, 책 표지 등에 문양을 박는 데 쓰인 조선시대 능화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지호 객원기자 yaho@chosun.com

옛 판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그의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대표작 '공(空)' 시리즈는 양각(陽刻)의 나뭇결이 깊이 있고 명상적인 공간을 연출해 내는 것이 특징. "옛 목판화를 보면서 세월이 지날수록 나뭇결이 더 또렷한 요철(凹凸)을 만들어내는 데 감명을 받았어요. 덕분에 나뭇결을 '시간'의 상징을 받아들이고 작업하게 됐죠." 2005년엔 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서 조선시대 목판화 연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에게 판화는 예술로서 '그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보자기, 책 표지 등에 문양을 박는 데 쓰인 '능화판화(菱花版畵)', 시나 편지 따위를 쓰는 종이인 시전지(詩箋紙)에 장식용 무늬를 찍어 넣기 위해 만든 '시전지판' 등 다양하다. "판화 작업이 우리 조상들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건, 우리 인쇄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거죠. 그렇게 소중한 사료(史料)인 판화가 문화유산이라기보다는 '흔적' 정도로 가벼이 여겨지는 풍토가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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