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은 연주자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등의 음악가들이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플루티스트 최나경은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빈에서 열게 됐다. ‘동양인’과 ‘여성’이라는 핸디캡이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리지는 못했다.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은 유럽, 그중에서도 많은 음악가들이 활동했던 오스트리아 빈을 꼽을 수 있다. 빈은 음악의 본고장이라는 자부심만큼이나 보수적인 분위기로 유명하다. 유명 오케스트라에 여성과 동양인이 입성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아직까지 그 수도 많지 않다. 빈 필하모닉의 경우 첫 입단한 여성 단원은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무대에 서더라도 카메라에 손만 잡히도록 지시받는 등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본격적으로 여성이 무대에 오른 건 10년이 채 안 됐다. 그에 반해 빈 심포니는 빈필에 비해 비교적 여성 단원에게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동양인은 현재 단 한 명만 존재할 정도로 인종에 대한 벽이 높기만 하다.

빈 심포니의 이러한 아성을 무너뜨린 연주자가 나타났다. 플루티스트 최나경. 그녀는 112년의 전통을 가진 빈 심포니에 입성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유럽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동양인 관악기 수석주자가 됐다.
“당시에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어요. 인터뷰하면서 제가 어떤 일을 해냈는지 깨달았죠. 연주에서만큼은 완벽주의자 스타일인데, 오히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하게 준비했던 것 같아요. 운도 따랐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가 잘됐고, 제 모든 걸 보여줄 수 있었기에 가능했죠.”
블라인드 오디션의 기적
최나경은 미국 5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신시내티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 부수석으로 6년째 활동하고 있다. 당시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에 입성한 한국인은 그녀가 최초였다.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은 늘 가지고 있었으나, 유럽 오케스트라는 동양인 여성이 넘기에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빈 심포니 플루트 수석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기대 없이 이력서를 보내고 나서 라이브 오디션에 참가하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이 ‘나를 놀리나?’였죠. ‘뽑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유럽은 텃세가 심하고, 빈의 경우는 자국 연주자들을 뽑지 동양인에게는 거의 기회를 주지 않으니까요.”
빈 심포니 플루트 수석 자리에 전 세계 245명의 연주자가 지원했고, 이 중 32명만이 빈에서 치러지는 라이브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었다. 비록 라이브 오디션의 초대장을 받았지만 포기하고 있었던 그녀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그녀의 스승이었다.
“선생님은 좋은 기회일 거라면서 무조건 가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저는 연주 스케줄도 빡빡하고, 준비도 하나도 안 되어 있고, 결정적으로 동양인은 안 뽑을 거라면서 변명을 늘어놓았어요. 실제로 라이브 오디션 곡은 책 한 권에 해당할 정도로 방대했어요. 그래도 선생님은 ‘도전이 없는 삶은 안타깝다’면서 ‘Do it!’만 반복하셨죠.”
아무 기대 없이 찾아간 빈에는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플루트 연주자들이 모여 있었다. 유명한 오케스트라 수석, 국제 콩쿠르 우승자, 빈 심포니의 객원 출신 연주자도 있었다. 각 파트 수석이 참석한 오디션은 1차 관문이 블라인드 오디션이었다. 막 뒤에 선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동양인인 데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가진 그녀에게 블라인드 오디션은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과는 만장일치. 1차에서 만장일치를 받은 연주자는 최나경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이후 막 없는 오디션이 계속됐고, 마지막 세 명을 남겨둔 최종 오디션을 앞두게 되었다.
“최종 오디션에는 저를 포함해 이탈리아 남자, 오스트리아 여자, 이렇게 세 명이 올라갔어요. 오스트리아 여자는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어요. 알고 보니 그녀는 예전 수석의 제자여서 단원 대부분과 아는 사이였고, 최종 후보 중 오스트리아인은 자기 혼자라 당연히 붙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 무대 뒤에서는 누구를 뽑을 것인가에 대한 설전이 오고갔다. ‘두 명 다 뽑은 다음 나중에 공석이 생기면 채우자’는 중도론도 나왔다. 그러던 중 한 단원이 용기를 내어 “우리가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단원들을 설득했고, 결국 최나경이 플루트 수석으로 뽑혔다.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자, 오스트리아 연주자는 충격을 받은 듯 축하한다는 말도 없이 그냥 나가버리더군요. 오케스트라 매니저가 단원들에게 인사하라고 해서 나갔더니 스무 명의 단원들이 오랫동안 기립박수를 쳐줬어요.”
옷장 속에서도 연습한 ‘플루트의 달인’
한국에서 최나경은 ‘플루트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SBS <스타킹>에 출연해 기인에 가까운 일명 ‘속사포 연주’를 선보인 뒤부터다. 그녀가 플루트의 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열 살 때부터 시작된 피나는 연습 덕분이다.
“어렸을 때는 기초를 잡기 위해 부모가 무섭게 연습을 시키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는 정반대였어요. 부모님은 제게 입버릇처럼 ‘그만 연습하고 자라’고 하셨지만, 하루라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했어요. 제가 정말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니까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이러한 노력 끝에 최나경은 서울예고 1학년 재학 시절, 미국 커티스음악원의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각 학년에 단 한 명의 플루트 전공자만 받았으니, 이것으로도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가늠할 수 있으리라. 음악 영재들이 수두룩하던 이곳에서 그녀는 정말 원 없이 연습만 했다.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만 빼면 모두 연습 시간이었다. 연습에 몰두하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기도 했다.
“관악기는 입술 근육이 쉬 피곤해지기 때문에 하루 서너 시간 정도밖에 연습할 수 없어요. 그 이상을 하면 오히려 소리가 망가지죠. 그래도 저는 ‘소리가 맛 좀 가면 어때. 못할 게 뭐야’ 하는 마음으로 연습만 했어요.”
최나경의 경쟁 상대는 같은 악기 전공생들이 아니었다. 첼로, 바이올린 등 전혀 다른 악기를 전공하는 친구들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현악기 소리를 들으면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관악기 연주를 들을 때면 ‘그냥 부는구나. 안 틀리고 잘하네.’ 정도로 별 감흥이 없는데,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친구들을 보면 감동이 밀려왔어요. ‘쟤는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구나’, ‘깊은 감동을 주는구나’, ‘음악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그런 감정으로 인해 제 음악을 돌아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남들보다 2, 3년이나 빨리 대학 생활을 시작했으니, 고등학생 시절을 건너뛰고 성인이 된 셈이다. 원하는 공부나 연습을 맘껏 할 수 있다는 건 좋았지만,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은 그녀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친구들은 모두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다녔어요. 대학을 다니면서도 늘 ‘나는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으니까요. 시간이 흘러 친구들이 모두 대학생이 되자, 그 모습이 무척 낯설었어요. 교복 입은 학생만 보면 마치 제 친구 같았죠. 저만 고등학생으로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 그런 감정이 오래 가더라고요.”

재기 불능 판정을 받았던 암흑의 나날
음악이 전부인 최나경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위기가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오른손으로는 숟가락도, 연필도 들 수 없었어요. 물론 연주도 할 수 없었죠. 많은 의사를 만나봤지만, 그 누구도 제 병명을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았어요. 막연히 ‘신경 쪽 문제인 것 같다’고만 하더군요. 막막한 시간이었죠. 어떤 의사는 ‘앞으로 연주는 못 할 것 같다’는 말도 했어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던 것 같아요.”
악몽과도 같은 4개월이었다. 오른손을 못 쓰게 됐으니 왼손으로 글씨 쓰고 밥 먹는 연습을 했다. 곧 회복될 거라는 주변의 위로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음대를 다니면서도 음악을 하지 못하는 게 너무 서러웠어요. 연습은 물론 필기조차 할 수 없었고, 시험을 볼 수도 없었어요. 구술로 시험을 치게 해주신 선생님이 계셨던 반면, 제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너 언제 괜찮아지니?’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죠. 매우 예민했던 때라 상처가 더욱 컸어요. 아무런 배려 없이 제 상태를 물어보는 사람들도 제겐 모두 상처였죠.”
그녀에게 가장 큰 적은 ‘다시는 연주를 못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었다. 24시간을 음악으로 채우고 살았던 사람이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니 그 막막함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정말 연주를 못 하게 되면 앞으로 뭐 하고 살지?’ 이런 두려움이 엄습해왔어요. 성적도 좋았으니 찾아보면 할 수 있는 건 많았지만, 하고 싶은 건 하나도 없었어요. 곰곰이 생각해봐도 플루트를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 결론뿐이었어요. 그때부터는 제 신념을 믿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나아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휴식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충분히 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4개월이 지나고 처음 레슨을 가는 날이었어요. 슈만의 ‘로망스’를 연주했는데 선생님이 박수를 치시면서 ‘소리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못했지만, 음악성은 예전보다 늘었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쉬는 동안 음악회를 많이 다니면서 복귀할 시간을 간절히 기다렸더니 음악적으로 성숙해졌던 것 같아요. 졸업식 때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지난 4개월 동안 넌 잃은 게 없다. 나는 너를 믿었다. 정말 멋지다’라고.”
한국에서 16년, 미국에서 12년을 보낸 최나경은 이제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정들었던 신시내티를 떠나는 마음은 섭섭하고 아쉽지만, 빈에서 지낼 생각을 하면 마냥 설렌다.
“미국에서만 공부했기 때문에 유럽 생활은 처음이에요. 음악의 본고장에서 음악뿐 아니라 그곳의 문화를 접할 생각에 기대가 커요. 한국을 떠나올 때의 기분이 다시 느껴지더군요.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같은 대음악가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도시 빈에서 열게 됐어요. 음악가로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요?”
최나경의 두 장의 앨범
<Jasmine Choi plays Mozart>·<판타지>

최나경은 2006년과 2011년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데뷔 앨범인 <Jasmine Choi plays Mozart>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음반으로, 우리 귀에 익숙한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D장조와 C장조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하피스트인 쉐비어 마이어와 함께 연주했다.
<판타지>는 다양한 작곡가들의 환상곡만을 모은 음반이다. 프랑수아 보네의 ‘카르멘 환상곡’, 알베르트 프란츠 도플러의 ‘헝가리 전원 환상곡’, 폴 타파넬의 ‘마탄의 사수 주제에 의한 환상곡’ 등이 수록돼 있다.
/ 여성조선(http://woman.chosun.com/)
취재 두경아 기자 | 사진제공 최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