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연기 위해… 노배우, 춤바람 나다

입력 : 2012.06.01 23:42

[연극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서 춤연기까지 펼친 배우 이호재]
죽음 앞에서도 희망 찾는 모리의 인생관 진지하게 전해
"살아온 시간이 쌓여 인생은 완성되는 것"

올해 나이 일흔둘, 배우 이호재가 '춤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지난 28일, 그가 레슨을 받는다는 현장을 급습(?)했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한 연습실에서 빨간 티셔츠를 입은 이씨가 스텝을 밟고 있었다. 스윙과 탱고에 막춤까지 등장했다. "난 평생 춤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됐네." 그의 '자백'은 의외로 술술 나왔다.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게 연극 때문이라고.

◇'모리와…'에서 죽음을 긍정하는 교수로 출연

그는 31일 개막한 연극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제작 컬티즌·연출 최용훈)에서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으로 투병하다 78세에 세상을 뜬 모리 슈워츠 교수로 출연한다. 연극은 모리의 제자 미치 앨봄(54)이 매주 화요일 스승을 찾아간 논픽션 원작을 무대로 옮겼다. 미치 역은 성우 송도순(61)씨의 아들인 배우 박준혁(37)이 맡았다.

연극‘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모리 교수 역을 맡은 배우 이호재씨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연습실에서 춤 장면을 연습하고 있다. 자유롭고 거리낌없는 모리 교수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이씨는 날마다 연습에 몰두했다. /극단 컬티즌 제공
연극‘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모리 교수 역을 맡은 배우 이호재씨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연습실에서 춤 장면을 연습하고 있다. 자유롭고 거리낌없는 모리 교수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이씨는 날마다 연습에 몰두했다. /극단 컬티즌 제공

공연에서 이씨는 춤추며 등장했다 춤추며 사라진다. 춤 장면이 나오는 것은 길어야 2~3분. 그런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에 한 시간씩 연습을 빠지지 않았다. 이씨는 "모리 교수가 춤을 잘 췄다고 하는 데다,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춤추다 쓰러져서 알게 된 것이라 진지하게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조명이 켜지고 관객이 숨을 죽이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와. 그 느낌을 관객에게 전하는 거지."

그는 그런 '울컥함'과 50년째 함께하고 있다. 1963년 '생쥐와 인간'(연출 김벌레)으로 데뷔한 그는 배우 전무송과 '30년 짝꿍'. 평론가들은 '전무송의 긴장, 이호재의 이완'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이호재 자신은 스스로를 '이완의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우가 누군들 긴장 안 하겠어? 물론 (전)무송이는 긴장했을 때 굉장히 멋있지. 난 상대 연기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서로 편안하게 생각해야 결국 작품이 잘 되는 거지."

그가 무대를 통해 전하는 편안함은 결혼이라는 인연으로도 이어졌다. 1971년 '잉여부부'(작 닐 사이먼)에 출연할 때 분장실로 꽃을 사 들고 온 여인이 있었다. 이호재가 실연당한 펠릭스(전무송 역)를 다독이며 세 번 이름을 부르는 장면을 보고 "이 사람과 결혼하면 위로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팬이었다. 정작 이호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꽃은 무슨, 술이나 사오지." 그녀는 굴하지 않고 다음 날 맥주 한 상자를 들고 찾아갔다. 2년 후 둘은 결혼했다. 유독 빨간 뚜껑의 진로소주를 좋아해 '빨간 소주'라는 팬클럽 모임도 있는 그는 식사 자리에서 차가운 소주를 새로 딸 때마다 아이처럼 눈빛이 반짝인다. 그 눈빛이 무대에 서면 섬광이 된다.

◇"내 안에는 내가 살아온 세월이 쌓여 있어요"

'모리와…'를 연습하던 이호재는 "죽음을 담담하게 말하는 그에게 놀랐다"고 말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적 가치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모리의 메시지는 자칫 도덕 교과서에 실릴 법한 교훈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이호재의 육성은 그 말에 울림과 깊이를 부여한다. 죽음 직전에도 원자력 개발의 효용성에 대한 토론 모임(비록 앞집 총각이 유일한 외부 회원이었을지라도)을 열었던 모리 교수는 '누군가 내 엉덩이를 닦아줘야 하는' 상황 앞에 자존(自存)이 무너지는 두려움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 투명한 긍정의 힘이 관객의 가슴을 환하게 밝힌다.

이씨는 "극 중에서 '내 안에 내가 살아온 나이가 다 있어'라는 대사가 참 좋다"고 했다. "늙어가며 소멸되는 게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 쌓이며 인생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6월 17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765-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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