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서커스(연출가 로베르 르파쥬와 그 기술력), 바그너 상상을 구현하다

입력 : 2012.05.02 23:41

'니벨룽의 반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서 5일 공연
불의 고리, 물밑 인어 등 묘사… 45t 장치·CG 스크린 총동원
최첨단 기술로 환상적 무대 4부작 전체 4일간 16시간 공연

‘라인강의 황금’도입부, 인어 셋이 물 밑을 헤엄치는 장면. 물방울의 움직임까지 재현해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제공
'오페라의 왕'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대표작 '니벨룽의 반지'는 작품이 쓰인 19세기 무대 기술로는 구현이 불가능한 묘사들로 가득 차 있다. 1부 '라인강의 황금' 초반에 나오는 인어 장면을 '물 밑에서 헤엄친다'라고 묘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신들이 무지개 다리를 건넌다' '신의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산꼭대기 불의 고리 한가운데 브륀힐데(여자 주인공 중 한 명)를 눕힌다'…. 지금까지 무대 기술로 바그너의 상상력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환상적인 무대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 카(Ka)'를 만든 캐나다 연출가 로베르 르파쥬가 미국 뉴욕에서 21세기 첨단 기술을 동원해 바그너의 상상력을 무대에 구현하는 도전에 나섰다.

공연은 뉴욕의 대표 공연장인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메트)에서 4일간 총 16시간 동안 계속된다. 긴 공연 시간과 막대한 무대 장치 탓에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전체가 무대에 선보이는 일은 매우 드물다. 메트에도 4부 전체가 올려진 것은 1987년 이후 25년 만이다. 피터 겔브 메트 총감독은 "이번 공연엔 현대의 무대에 동원 가능한 모든 첨단 기술을 집약했다. 르파쥬의 연출은 바그너가 상상했던 무대의 모습을 가장 근접하게 구현해냈다"고 말했다.

오페라 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45t에 달하는 최첨단 무대 장치다. 24개의 판자를 지지대에 이어 붙인, 시소 대열 같은 이 장치가 르파쥬가 이번에 선보이는 핵심 장비다. 가로 18m·세로 8m의 거대한 '기계'에 설치된 판자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돼 물결무늬 계단을 이루기도 하고 나란히 세워져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 영상을 비추는 스크린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인어들이 수영하는 장면에서 '기계'는 물밑 세상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낸다. 인어 역할을 맡은 오페라 배우들은 와이어에 매달려 기계 앞을 오간다. 관중은 인어 셋이 물 아래서 느리게 수영하는 듯한 장면을 보게 된다. 신들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선 판자 중 4개가 기울어지면서 무지갯빛 다리로 바뀐다. 브륀힐데가 신을 벗어나 인간으로 변하는 장면에서 '기계'는 거대한 화산을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모습으로 변한다. 르파쥬는 "배가 지구 끝에서 추락하지 않는다고 선원들을 설득해야 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된 기분이었다. 이 기계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배우들을 끊임없이 안심시켜야 했다"고 말했다.

바그너의 오페라'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1부인‘라인강의 황금’에서 용으로 변신한 난쟁이 알베리히를 신들의 왕 보탄(브라이언 터펠 역)이 마주한 모습.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제공
바그너의 오페라'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1부인‘라인강의 황금’에서 용으로 변신한 난쟁이 알베리히를 신들의 왕 보탄(브라이언 터펠 역)이 마주한 모습.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제공
배우들과 '기계'가 하나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한 디지털 인터랙티브 장치도 도입됐다. '태양의 서커스 카'에서도 사용했던 장치다. 배우들의 옷에 부착한 음성 센서가 노래의 흐름을 잡아내고 적외선 장치가 배우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인어 장면에서 가수들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작은 물방울 이미지가 이 장치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졌다.

메트가 '니벨룽의 반지'에 쏟아 부은 돈은 1600만달러(약 181억원). 메트 오페라 한 편에 보통 200만~400만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압도적인 금액이다. 메트는 무대 아래 철심을 박는 공사에만 16만달러를 쏟아부었다. 무대가 기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5년에 걸쳐 준비한 반지 4부작은 단 3사이클, 총 12회 공연으로 끝난다. 첫 번째 사이클은 지난달 24일 마무리됐고 마지막 사이클은 5일 시작된다.

메트가 "21세기의 혁명적 하이테크 '반지'"라고 묘사한 반지 4부작의 첫 사이클이 끝난 직후 나온 평가는 엇갈렸다. 르파쥬의 기계가 주는 비주얼은 압도적이지만, 역으로 무대장치가 주인공이 되는 바람에 음악이나 스토리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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