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우리보고 악보나 읽냐고? 오케스트라의 부엌 싱크대라고? 타악기의 반란

입력 : 2012.04.25 23:53
27세에 데뷔 음반을 발표한 신세대 타악기 연주자 마르틴 그루빙거. /유니버설뮤직코리아 제공
오케스트라에서도 구석진 말석(末席)에서 연주하고,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처럼 변변한 독주곡도 없습니다. 흥겨운 악기로 보이는 타악기는 실은 처량한 신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 '타악기는 솔로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에 연주자들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콜린 커리(36)는 지난 1994년 BBC의 '올해의 젊은 음악가'에 선정되고, 2010년 그래미상을 거머쥔 실력파 타악기 연주자입니다. 엘리엇 카터와 마이클 니먼 등 현대 음악 작곡가의 신작(新作)만 33곡을 초연했지요.

청각 장애인 이블린 글레니(46)도 현대와 대중음악을 넘나들며 170곡을 직접 위촉하고 연주해서 타악기의 지평을 넓힌 개척자로 꼽힙니다. "청력을 잃었지만,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소리를 느낀다"는 그는 1800여개의 타악기와 2800권의 타악기 악보를 보유한 수집광이며, 미국의 힙합 가수 에미넴과 '랩(rap) 협주곡'을 협연하고 싶어하는 진취적인 음악인이기도 하지요.

타악기 연주자에게도 직업적 애로 사항이 적지 않습니다. 최대 60개의 타악기를 펼쳐놓고 연주하는 글레니는 악기 설치에만 4시간, 공연 직후 악기 해체에만 다시 2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평생 하나의 악기만 붙잡는 다른 연주자들과 달리, 타악기 연주자는 실로폰부터 마림바까지 사실상 모든 타악기를 다뤄야 하지요. 영국 작곡가 제임스 맥밀런의 타악기 협주곡 '주여 임하소서(Veni, Veni, Emmanuel)'에서는 연주자가 25분간 지휘자와 악단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16종류의 타악기를 연주합니다.

청중의 무관심도 서럽습니다. 호른의 뒷자리에서 여러 악기를 펼쳐놓고 연주하기에 '부엌 싱크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커리는 미국 후원회에서 나이 지긋한 숙녀에게 "악보는 읽을 줄 아세요?"라는 질문을 받고서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타악기 주자들이 아무리 정확하게 연주하려고 해도, 정작 사람들은 즉흥 연주를 한다고 여긴다"고 말했지요.

최근 타악기에서 또 한 명의 신세대 스타가 탄생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의 마르틴 그루빙거(29)는 27세에 명문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데뷔 음반을 발표하며 혜성처럼 등장했지요. 최근 출시된 실황 영상 '타악기의 행성'에서 그는 23인조 앙상블과 함께 5개 대륙에서 영감을 받은 작곡가 6명의 6곡을 한자리에서 모두 연주하는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일본의 마림바 연주자 아베 게이코의 신비하면서도 박력 있는 '웨이브(The Wave)'로 출발한 이 음악회는 아프리카의 토속성, 재즈의 분위기가 흠씬 풍기는 미국의 흥겨움, 유럽의 이지적인 급진성, 록 음악을 연상시키는 호주의 개방성을 차례로 선보입니다.

대륙과 인종, 장르를 한데 아우르는 타악기의 향연에서 원시적 역동성과 화려한 초절(超絶) 기교, 젊음의 열기를 모두 느낄 수 있지요. 과거에 홀대를 받았던 악기들이 오늘날 주역으로 부상하는 모습에서 거꾸로 클래식 음악의 미래를 점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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