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인생 50년… 생략과 압축으로 무대에 詩를 쓰다

입력 : 2012.04.07 03:08   |   수정 : 2012.04.07 10:32

신작 '마늘 먹고…'서 에두름의 미학 펼치는 거장 오태석

웅녀가 맛이 갔다. 4345년 전 먹었던 마늘과 쑥의 약발이 다했다. 등에는 털이 숭숭, 손에는 손톱이 쑥쑥 자라났다. 도로 곰이 되기 전에 마늘과 쑥 부대를 이고 굴로 들어가야 할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성질 급한 호랑이는 어찌 됐나 궁금하다. 다시 만나 살살 달래 인간을 만들어볼까 싶다. 잘될까?

2012년 한반도에 여전히 살고 있는 웅녀는 지난 3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등장했다. 연출가 오태석(72)의 신작 '마늘 먹고 쑥 먹고'의 주인공으로 마무리 연습 중이었다. 뒤따라 호랑이가 나오고 웅녀 손녀 순단이도 등장했다. 지켜보던 오태석이 쩌렁쩌렁 외쳤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흘러가!" 성큼성큼 올라가 시범도 보였다. 그의 지시를 따라 3·4조 대사가 낭창낭창 휘어지고, 찰랑찰랑 감겼다.

◇연극 인생 50년…에두름의 미학으로 현실 너머 보여줘

'희대의 거장' '우리 연극계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최초의 연출가' 등 상찬(賞讚)을 받아온 그는 인터뷰 중 '거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아짜짜짜! 큰일 났네, 큰일 났어" 하며 아이처럼 웃었다.

'마늘 먹고'는 1962년 연세대 철학과 재학 시절 희곡 '영광'으로 신인예술상을 받으며 무대와 인연을 맺은 오태석의 연극 인생 50년 기념작. 웅녀 할머니가 도탄에 빠진 한반도를 일으키려 호랑이 총각과 백두산을 지나 만주까지 건너가는 여행기다. 오태석 특유의 생략과 압축의 리듬을 타고 빠르고 신나게 진행된다. 국립극단이 올해 야심 차게 준비한 '삼국유사'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며, '천년의 수인''내사랑 DMZ' 등이 조각보처럼 이어진 '오태석 종합선물세트'이기도 하다. "어느 작품에서 끄집어내다 갖다 붙여도 쓱쓱 봉합이 됐어요. 사람이 지닌 선함에 대한 믿음과 한반도에 대한 염려가 일관되게 흘러온 거죠."

그는 직설적인 고발보다 상상과 에두름의 미학을 통해 현실의 숨통을 틔여온 연출가다. "우리 할머니·어머니는 남의 가슴에 꽂히는 말을 안 했어요. 돌려 말해서 스스로 알게 했죠. 이번 작품에도 그런 에두름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주인공 웅녀는 모성(母性)에 대한 그의 형형한 신념을 웅변한다. 스포츠 스타 김연아까지 등장시켰다. "우리 역사는 할머니와 어머니 자궁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세상의 균형을 잡았던 것은 여성이죠."

지난 3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마늘 먹고 쑥 먹고’를 연습 중이던 연출가 오태석이 맨발로 무대에 뛰어올라가 호랑이 가면을 집어들고 호탕하게 웃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지난 3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마늘 먹고 쑥 먹고’를 연습 중이던 연출가 오태석이 맨발로 무대에 뛰어올라가 호랑이 가면을 집어들고 호탕하게 웃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지난 3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마늘 먹고 쑥 먹고’를 연습 중이던 연출가 오태석이 맨발로 무대에 뛰어올라가 호랑이 가면을 집어들고 호탕하게 웃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그는 이번 작품에서 배우 33명에게 가면 100개를 씌웠다. 배우가 가면을 쓰면서, 관객은 '가면'을 벗을 기회를 얻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일상에서 철가면을 쓰고 살잖아요. 그 가면을 두 번 벗을 기회가 있는데, 가톨릭 신자가 고해할 때하고, 관객이 입장권을 샀을 때예요. 극장에 들어서면서 가면을 벗고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오태석은 "관객을 네 살 무렵 해맑던 때로 돌아가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배우가 게으른 것은 죄악입니다. 순수한 땅과 같은 관객에게 게으름이 들어찬 무대를 보여주면 죄인인 거죠." "연극 7할은 관객이 만든다"고도 했다. "가면이 흰색인 것도 관객이 빈 얼굴에 그림을 그려넣으라는 것입니다. 연출가는 최소한의 단초만 줄 뿐, 연극을 완성하는 것은 관객입니다."

◇"미궁에 빠진 언어…아름다운 우리말을 잊지 말았으면"

이번 연극에는 그의 작품 중 처음으로 자막기가 나온다. 무대 중앙에 걸린 전광판에서 노랫말을 쏜다. 우리말의 가락을 사랑하는 그가 관객을 향해 내건 애달픈 깃발이다. "요즘 아이들이 육두문자를 얼마나 쉽게 씁니까. 세상이 기호화·부호화 돼 가면서 언어가 미궁으로 떨어졌어요. 말이 그대로 노래가 됐던 때의 아름다운 단어를 상기시켜주고 싶어요."

'마늘 먹고'에서 오태석은 잃어버린 시절로 돌아가는 여행의 안내자가 된다. "여러분 안에 아름다운 게 가득한 '좋은 방'이 있어요. 그 방의 문을 따주는 게 제가 할 일이고, 연극이 할 일입니다. 방으로 들어가면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내가 이런 때가 있었지, 아름다운 것이 있었지' 하고 깨닫게 될 겁니다."

그의 가슴 속 '좋은 방'에는 충남 서천의 고향 마을이 들어 있다. 일제 식민지 시절, 비바람을 뚫고 만주 벌판에서 두루마기 자락 날리던 윤봉길과 안중근도 있다. 그들이 누비던 만주 땅을 상상 속에서라도 되찾아보자는 생각이 '마늘 먹고'를 관통한다. 대사의 행간마다 그의 외침이 우렁차다. "곰이 되자!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가 만주 땅에서 실컷 뛰고 뒹굴어 보자! 연극에서라도 해보자!" 칠순 거장이 초대하는 여행은 8일 시작된다. 문의 명동예술극장,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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