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경, 그 잘 익은 연기는 용서·회한이다

입력 : 2012.03.25 23:41

연극 '봄날' 다시 주연
28년전 초연, 48세였던 그 - 모두 가진 욕망의 아버지 役, 그래도 관객이 사랑하게 연기
문닫고 울었던 무료 배우학원 송백당 10년만에 다시 열어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닭도, 쌀도, 담배도 아버지 것이다. 일곱 아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안 차는 쑥떡뿐. 아버지의 욕망과 아들들의 허기 사이에서 피어오르던 갈등은 나른한 봄날에 반란의 불길로 번진다. 연극 '봄날'(작 이강백·연출 이성열)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며 군림하는 폭군 아버지로 나오는 배우 오현경(76)은 "학대하는 아버지라 해도 관객이 공감하고 사랑할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연기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공연장인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그는 "장남의 등에 업혀 언덕을 넘으며 '네 에미를 업어준 적이 있었지'라고 회상하는 장면에서 관객에게 가슴 시큰할 순간을 전달하려고 애썼다"고 설명했다.

오씨는 1984년 초연 때도 아버지 역을 맡았다. "48세이던 그때보다 지금은 여유가 생겼어요. 무대에서 노는 것 같습니다." 오씨가 극 중 아버지 나이를 넘어선 것처럼, 작가 이강백(65) 서울예대 교수의 시선도 바뀌었다. 지난 13일 '봄날' 제작진을 위해 불고기 저녁을 사주러 대학로에 나선 이 교수는 "초연 때는 극 중 아들이 돼 아버지를 흉보고 저항했으나, 이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아들을 꾸짖고 서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봄날'은 2009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 올라 서울연극제 연출상(이성열),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대상(오현경)을 수상했다. 아버지의 돈 항아리를 들고 도망간 아들들은 돈을 얻었으나 고향을 잃게 된다. 짧은 봄은 가고 용서와 회한의 여름이 온다. 극 중 삽입되는 시와 그림·편지들이 이야기 사이사이에서 갈등을 조였다 풀어주며 다시 못 올 화사한 세월이 무대에서 펼쳐졌다 사라진다. 이번 공연에서는 명동예술극장 공간의 특성상, 품에 안긴 듯 고즈넉하고 아늑한 초연 때의 무대 미학이 살아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래도 '오현경의 연기생활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성공작'(연극평론가 구히서)이라는 평가를 받은 오씨의 연기는 여하한 단점까지 메우고 남을 정도의 경지를 보여준다. "죽기 전에 얼굴이나 다시 봤으면…"이라는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극장을 흔들고 관객의 가슴에 봄날의 꽃밭을 피운다.

연극‘봄날’에서 아버지 역을 맡아 호평받고 있는 배우 오현경이 극 중 욕망의 상징인 돈 항아리를 앞에 두고 웃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연극‘봄날’에서 아버지 역을 맡아 호평받고 있는 배우 오현경이 극 중 욕망의 상징인 돈 항아리를 앞에 두고 웃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모든 것을 가진 아버지로 나오지만, 그 자신은 전부를 걸었던 걸 잃어봤다. 2000년대 초반 운영하던 무료 배우 학원 송백당(松栢堂)을 재정난으로 닫아야 했을 때였다. 오 씨는 "태어나 그렇게 크게 울어본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아, 돈이 필요하구나, 돈이 없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토록 아픈 눈물을 뿌렸던 '송백당'이 최근 대학로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통 큰 아내' 윤소정(68)씨의 선물이었다.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건물을 빌렸느냐"고 화를 내는 남편에게 아내는 "돈 싸들고 저승 갈 것도 아닌데, 요즘 제 TV드라마 출연료가 들어오니 그걸 보태자"고 설득했다. 70평의 절반을 학원 공간으로 쓰고, 절반은 연습장으로 임대해 월세에 보탤 예정이다. 정식 수업은 '봄날'이 끝나고 내달 초 시작한다. 6명씩 2주간 가르친다. "요즘 배우들의 가장 큰 문제인 화술을 위주로 가르칠 계획"이라고 했다. "마이크 쓰면 되는데 화술과 발성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분이 있어요. 저도 지방에서 1200석 대극장 공연할 때 마이크 써본 적 있어요. 편하죠. 적당히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연극은 그런 게 아닙니다. 밑바닥의 감정을 육성으로 전달할 줄 알아야 배우입니다. 발성이 안 되면 연극배우 하지 말고 팬터마임을 하세요."

식도암·위암 등 잇단 병마를 이겨낸 의지의 화신인 그는 건강에 대해 초탈했다. "안 죽는 사람 있나요. 죽을 것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살아있어 연기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해야죠."

▲연극 '봄날' 4월 1일까지, 명동예술극장,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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